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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1-07-04
|확인일자=2007-11-30
}}</ref> 했고, 서울 남로당 총책 홍민표를 전향시켰고 ,[[국회 프락치 사건]], 여간첩 김수임 사건 등 이 시기의 대표적인 공안 사건을 담당했다. 1950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우세가 점쳐지자 자유당의 하수단체인 대한정치공작대가 제1야당인 [[민국당]]인사들을 간첩들과 밀통하였다하여 붕괴시키려하자 이에 의문을 품고 수사를 하여 조작극임을 밝혀내었다. 공산주의와 싸우는 동안 신변의 위협이 많았고 그를 없앨 목적으로 침투한 간첩이 서울 아현동에 세탁소를 차려놓고 기회를 엿보다가 70년에 체포되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에 검찰총장직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안보교육 활동에 힘썼다. 변호사로 개업한 후에도 [[북한연구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는 등 여러 보수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박홍 (신부)|박홍]]의 [[한국통신]] 노조 [[주사파]] 발언 사건, [[권영해]]의 북풍사건을 변론하고 보수 우익 인사에 대한 지원에 힘썼다.
 
[[1977년]] [[정일형]]이 [[3·1 명동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여 치러진 종로 중구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제11대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학원(學園)문제, 남북대화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84년말 의원직을 사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