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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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은 [[1129년]]<ref>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는 이자겸이 죽고 3년이 지나 그 부인 최씨를 불러들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1129년]]에 있었던 일이 된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1128년]]의 일로 나와 있으므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고려사》의 기록을 따랐다. </ref> 이자겸의 아내 최씨를 불러들였으며, 다시 변한국 대부인에 봉하고, 혈연을 생각하는 뜻에서 [[1136년]] 이자겸에게 [[증직|증]] 검교 태사(檢校太師) 한양공으로 추증하였다.
1145년(인종 23년) 여름 4월에 이자겸(李資謙)의 아들들에게 양곡 6백 석(碩)을 하사하였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자들이 집권하고, [[조선]] 건국 이후 《[[고려사]]》,《[[고려사절요]]》 편찬되면서 그는 역적으로 단죄되어 그의 시문과 작품은 모두 소각되고소각되었으며 인멸되었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자들이 집권하고, [[조선]] 건국 이후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되면서 그는 역적으로 단죄되어 그의 시문과 작품은 모두 소각되고 인멸되었다.
 
== 평가와 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