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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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발의 순간 ==
1985년 6월 22일, 13시 30분(그리니치 표준시)에 에어 인디어 181/182편 탑승 수속에서 예약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만짓 싱이라싱이라고 지칭하는하는 사람을 불렀다. 그는 만짓 싱에게 대기 명단에 있는 관계로 양자택일을 제시했으나 싱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만짓 싱은 캐나다 퍼시픽 항공 밴쿠버발 토론토행 비행편의 체크인 우선 순위중 30번째로 체크인을 했으며 오전 9시 18분 출발 예정이었다. 그는 직원인 제니 아담스에게 어두운 황색과 수직으로 된 자신의 [[샘소나이트]] 슈트 케이스의 탁송을 요구했으며 그리고 인도 방면 에어 인디아 181편이나 182편으로의 수하물 환승 연결을 요구했다. 해당 직원은 그의 토론토발 몬트리올행과 몬트리올발 뭄바이행 좌석이 확인되지 않은 관계로 수하물 체크인을 즉각 거부했다. 싱은 거부 사유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직원은 다시 싱의 주장을 부정하고 다시 싱에게 설명했다 "손님이 확인했지만 손님의 티켓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손님의 수하물이 연결되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싱이 다시 말했다 "기다려요 내가 동생을 데리고 올게요" 그는 그것을 위해(사실은 거짓이었다.) 다시 다른곳으로 가기 시작하자 직원은 그제서야 그의 슈트 케이스 탁송을 수락했다 대신 싱에게 토론토에서 에어 인디아의 수하물 확인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 직후 체크인 직원이었던 아담스는 뒤늦게 182편에 실린 가방이 속임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직원이 염려했던 그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16시 16분 캐나다 퍼시픽 항공 60편은 싱을 태우지 않고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피어슨 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르얏은 사건 후 아침에 형제간 거래를 위해 던컨에서 밴쿠버까지 페리를 이용했다는 진술을 했다. 전화 통화기록은 그날 이후 오전 10시 50분부터 오후 4시까지 르얏의 거주지에서 조할의 번호로 전화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르얏은 오전 10시와 11시 30분 사이 파마르의 집 근처에서 버나비에 있는 자동 해양 전기장비 매장에 다른 동인도인의 단체를 목격했다. 파마르는 12볼트 배터리 2개를 사서 통에 담은채 폭발 장치와 비슷한 장치의 효용성 테스트를 했으며, 그들은 파마르와 함께 특수한 금속 받침대에 알맞은 재료들을 사왔다. 순경이었던 클라크 말로는 사건 후에 거기서의 일을 생각했는데 "인더르지트 싱 르얏이 버나비에 있는 자동 해양전지장비 전문 매장에서 배터리를 획득하고 폭발 장치에 포함된 배터리를 조립할고 나서 슈트 케이스에 실려 밴쿠버 공항으로 운반될 시간은 충분했다"고 했다.
 
그 이전 20시 22분경 L 싱(그의 경우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도 1시 37분에 도쿄로 가는 캐나다 퍼시픽 항공 3편에 실을 목적으로 수하물 체크인을 했으며 그것도 도쿄에서 방콕으로 가는 에어인디아에어 인디아 301편으로 옮겨 실릴 예정이었다(후에 나리타공항에서 301편에 실리기 직전 폭발했다.). 하지만 L 싱도 만짓 싱과 마찬가지로 탑승하지 않았다.
 
20시 22분(그리니치 시간) 캐나다 퍼시픽 항공 60편이 12분 후에 토론토에 도착했다. 몇몇 승객과 수하물 가운데서는 싱의 가방도 확인되었으며 에어 인디아 182편으로 옮겨졌다. 시크 운동가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여 에어 인디아는 몬트리올과 토론토 공항 터미널에 상주하면서 추가 보안을 이끌기 위해보안대책으로 캐나다에서 할당된 여분의 경찰관을 요구하였으며 X선 혹은 수작업으로 모든 수하물을 검색하였다. 하지만 후에 X선 장치가 고장나면서 휴대용 PDD 4 폭발믈 탐지기를 사용하는 계수 검사로 바뀌었다. 에어 인디아의 한 보안담당 직원은 그것이 큰 비명소리를 냈으며 한 인치 떨어진 곳에서도 일치하면 불이켜졌는데 그것이 가방 가장자리 주위에서만 사용되었음을 증명하였다.
 
6월 23일 0시 15분 181편은 "'카니슈카 황제"'로 명명된(당시 팬 아메리칸 항공과 마찬가지로 에어 인디아도 항공기마다 별칭을 부여했다.) 보잉 747-232B 항공기로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몬트리올 미라벨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182편은 왼쪽 주날개 밑에 설치되어 있던 5번째 엔진(스페어 엔진) 수리를 위해 인도로 보낼 목적이었기 때문에 40분에서 1시간 가량 출발이 지연되었다. 해당 엔진과 관련된 부품의 일부는 후방 화물칸에 저장되었다적재되었다. 사고기는 오전 1시에 몬트리올 미라벨 국제공항에 도착했으며 그때 비행편 번호는 181에서 182편으로 바뀌었다.
 
182편은 런던 히드로 공항을 경유하여 델리의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과 뭄바이의 [[차트라파티 시바지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329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307명의 승객과 22명의 승무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행 승무원은 기장인 한세 싱 나렌드라는 [[부조종사]]인 삿윈더르 싱 빈더르와 같이 지시자의지휘의 역할을 했으며 항공기관사는 다라 두만시아로 구성되어 있었다. 승객들의 상당수는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07시 14분 01초 182편의 비행 승무원들은 [[섀넌 공항]] 관제소에 "'스쿼드 2005"'를 요청한 직후 갑자기 실종되었다. 폭탄은 일본 산요사의 라디오에 내장되어 있었으며 배송 화물의 슈트 케이스에 실려있다가 사고기가 고도 31,000피트(9400m)에 이르렀을때 폭파되었다. 급격한 감압과 함께 182편은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잔해와 파편은 [[코크 주]] 연안에서 120마일(190km) 떨어진 남서 아일랜드 해안 수심 6,700피트(2,000미터) 지점에 가라앉았다. 섀넌 관제소는 아무런 구조신호를 받지 못했다. 관제사들은 항공기들이 있는 공역에 182편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위치로 계속 호출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07시 30분 정각에 관제소는 비상사태를 발령하고 주변의 화물선과 아일랜드 해군 함정에 수색을 요청했다.
 
폭탄이 든 두번째 가방은 L 싱에 의해 체크인되었으며 밴쿠버발 도쿄행 캐나다 퍼시픽 항공 3편으로 갔었다운반되었다. 거기에서는 해당 비행편의 수하물이 X-레이로 검사되지 않았다. 그것은 에어 인디아 301편을 겨냥했으며 177명의 승객과 승무원과 함께 방콕 [[돈무앙 국제공항]]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182편이 폭파된지 55분 후에 해당 폭탄은 나리타 공항에서 폭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2명의 일본인 수하물 직원들이 사망하고 4명의 다른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 잔해와 시신의 회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