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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File:Segeomjeong-Jahamun checkpoint July 2011.jpg|세검정에서 자하문 사이에 있는 경찰 검문소|섬네일]]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민족보위성]] [[민족보위성 정찰국|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세검정 창의문을(서울)|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대한민국 군·경은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1월 31일]]까지 전개하였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찰관)|최규식]] 총경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하였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북으로 넘어갔다. 도주한 이는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으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한 인물로역임하고 2000년, 2007년에 방한하여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224093 '신동아 2월호'…"YS청문회 막으려 940억 풀어"] 신동아 2004-01-30 </ref>
 
== 결과 ==
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나, 이 사건 이후에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하여, 박정희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일반학교에서[[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불발에 그쳤다. {{출처|날짜=2010-9-28}}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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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각주|2}}
<references/>
 
==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