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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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재위 기간이 길고, 사료도 방대하여 많은 사람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계전]], [[최항 (조선 문신)|최항]],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신숙주]], [[양성지]], [[유성원]] 등으로 총 편수관 4인과 기주관 23인, 기사관 25인 외에도 많은 사자관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분량이 방대하여 처음에는 한벌만 마련하여 [[춘추관]]에 두었다가, [[조선 세조|세조]] 12년([[1466년]])에 양성지의 건의로 이미 편찬된 《[[문종실록]]》과 함께 활자로 인쇄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 성종|성종]] 3년([[1472년]])에 3부의 인쇄를 마쳤다. 이후 [[충주]]와 [[전주]], [[성주]]의 세 사고에 보관하였으나 이후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두 사고본과 춘추관본이 소실되었다. [[조선 선조|선조]] 말년인 [[선조 41년|1608년]]에 다시 인쇄하여 여러 사고에 봉안토록 하였다.
 
==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