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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
당초 정원은 1명으로, 남만 선박이 입항하는 현지 사무가 성수기가 되었고, 이전(6월 무렵)에는 나가사키에 온 남만선이 돌아간 후(10월 경) 에도로 돌아가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시마바라의 난]] 이후 유사시 규슈의 다이묘의 지휘 때문에 [[1638년]] [[간에이]] 15년 이후는 반드시 한 명은 상주하게 되었다. [[1633년]] 간에이 10년 2월에 2인제가 되었고, [[1686년]] 조쿄 3년에는 3인제가 되었으며, 이어서 [[1699년]] 겐로쿠 12년에는 4인제, [[1713년]] 쇼토쿠 3년에 3인제로 정원이 변천하여 [[교호|교호 연간]]([[1716년]] - [[1736년]]) 이후는 대체로 2인제로 정착한다. [[1843년]] [[덴포]] 14년에는 1인제가 되었지만, [[1845년]] [[고카]] 2년에 2인제로 환원되었다. 정원 2명 중 1년 교대로 에도와 나가사키에서 채우고, 매년 8월에서 9월 무렵 교체를 했다. 또한 [[1746년]] [[엔쿄 (1744년)|엔쿄]] 3년 이후 한때 [[칸조간조 봉행]]이 겸임했다.
 
봉행은 노중의 지배 하에 에도 성에서 쓰메세키는 부용 사이에서 [[1690년]] [[겐로쿠]] 3년에는 대부격(종5위 아래)으로 알려졌다. 그 취임에 즈음해서는 [[에도 성]]에 등성하여 쇼군을 만나 그 직위에 임하도록 명받았다.
 
처음에는 부용 사이에 위치한 다른 구성원들은 모두 여러 대부였지만, 나가사키 봉행만 평민 신분으로 부용 사이의 말석을 차지했다. 우시고메 시게노리가 나가사키 봉행을 맡고 있던 시기, 당시의 로주 구제 히로유키에 대한 나가사키 봉행이 다른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제 대부가 될 수 있도록 청원이 이루어졌지만,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에게 거부를 당했다. 그 이유는 “기존 나가사키 봉행직은 외국 상인을 지배하는 직책이며, 외국인을 중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굳이 낮은 지위의 사람을 나가사키 봉행에 임명해왔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사키 봉행의 위계를 올리면 당연히 위계가 높은 사람을 그 직에 투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외국인을 지위가 낮은 신하가 관리해 왔었기 때문에, 그만큼 외국에서 막부의 위엄도 높다고 생각하기에 원국 봉행 중에서도 나가사키 봉행의 지위를 낮추어 부용 사이에서도 말석으로 해왔다. 따라서 나가사키 봉행의 지위를 올리는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