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천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9번째 줄:
 
== 역사 ==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았으며, 발해가 패망한 뒤에는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족]]의 땅이었다. [[고려]] [[고려 예종|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족을 내쫓고 성을복주성(福州城)을 쌓았으나([[동북 9성]]) 2년만에 성을 헐고 그 땅을 여진족에 반환하였다. 훗날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할로써 기록에는 당시 독로올(禿魯兀)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고 한다(《고려사》). 고려 말기 [[공민왕]](恭愍王)이 반원정책을 시행하면서 수복하였다쌍성 수복과 함께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우왕 8년([[1381년]])에 단주안무사(端州安撫使)로 고쳤다. 이듬해 요심 초적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동왕 11년(1385년)에는 왜구가 침공하기도 했다.
우왕 8년([[1381년]])에 단주안무사로 고쳤다가(세종실록 지리지)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태조 7년(1398년) 지단주군사로 고쳤으며, 이 때에 '채리'로 아오, 상가사, 어파홍, 군대의 4곳이 설치되었다. 태종 9년에는 시리(실실리), 기원, 마곡 등 3개 역소가 설치되었고, 동왕 13년에 단천이라는 이름으로 고쳐졌다. 세종 3년에 심합배역이 더 설치되었고, 31년에 읍성을 쌓았다.
 
우왕 8년([[1381년]])에 단주안무사로 고쳤다가(세종실록 지리지)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태조 7년(1398년) 지단주군사로 고쳤으며, 이 때에 '채리'로 아오, 상가사, 어파홍, 군대의 4곳이 설치되었다. 태종 9년에는 시리(실실리), 기원, 마곡 등 3개 역소가 설치되었고, 동왕 13년에 단천이라는 이름으로 고쳐졌다. 세종 3년에 심합배역이 더 설치되었고, 31년에 읍성을 쌓았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단천군수로 있던 [[강찬]](姜燦)이 [[정문부]]의 의병에 호응해 거병하여 왜군을 몰아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단천군수로 있던 [[강찬]](姜燦)이 [[정문부]]의 의병에 호응해 거병하여 왜군을 몰아냈다. 숙종 31년에 이인엽(李寅燁)이 경연 석상에서 단천군수를 마천령(摩天嶺)을 맡은 방어사로 삼아 성진(城津), 길주(吉州)와 함께 수비하게 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최석정(崔錫鼎)은 단천군수를 방어사로 삼을 필요 없이 단천과 길주가 함께 마천령을 지키고 안변과 회양이 함께 철령을 지키도록 하고, 평강 한 길은 두 도의 도신에게 물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주장하였다(《임하필기》).
 
* [[1939년]] [[10월 1일]] 단천면 일원, 복귀면 일부(두언태리, 오몽리, 룡암리)를 단천읍으로 승격하였다.<ref>조선총독부령 제169호 ([[1939년]] [[9월 30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