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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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 ==
목포가 개항한 것은 1897년 [[10월 1일]]로서 [[인천]]보다는 15년 뒤진 것이었지만, [[부산]]과 [[인천]]을 뺀다면 가장 이른 것이었으므로 상당히 빨랐다. 목포가 개항함으로서개항함으로써 무안군은 1906년 '''무안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지리적 요인 때문으로 목포는 후쿠오카나 나가사키에서 보면 중국 대륙을 두고 가운데 있었고 곡창지대인 호남의 물산을 집결, 유통하기 위해 일본은 목포 개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개항이 되자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한편 자치기관이 설치됐다.<ref>손영배, 《문지사 한국의 쓰레기 2천년사》</ref><ref>[데이코 D&S, 진한엠엔비. 《한국축제연감 2007》 706쪽]</ref> 일본인들의 거류지는 항구가 바로 앞에 있는 현재의 유달동 일대였으며 국권침탈 전에는 [[일본]] 영사관이 유달동 인근에 있었다. 이 건물은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개항장에서 상행위를 할 수는 있었으나 내륙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목포 근처의 영산포를 시작해 논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정부가 매겼던 세도 낮았던데다 일본의 논밭 가격의 십분지 일이었기에 땅 매입을 위해 주력했다. 강압에 의해 개항되면서 곡창지대인 호남쌀이 집결되는 곳으로서 쌀을 일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목포 개항 이후 국내 쌀값은 여섯 냥 하던 것이 1898년에는 14냥으로 뛰었다.<ref>KBS다큐멘터리해방제작팀, 《해방(테마로 읽는 20세기 한국사)》 13, 18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