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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들어서, 시에나는 대게 [[기벨린]]이였고 이와 대조적으로 [[피렌체]]는 [[구엘프]] 세력이였다(이 분쟁은 [[단테]]의 《[[신곡]]》 일부의 배경이 되었다).
 
1260년 9월 4일 시에나의 [[기벨린]]파는 [[만프레디|시칠리아의 만프레디 국왕]]의 군대의 도움을 얻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피렌체의 [[구엘프]]파를 패배시켰다. 전투 이전 시에나 군대는 대략 20,000명은 그들보다 많았단 피렌체의 33,000명의 군대와 직면했다. 전투에 앞서 시에나 시 전체는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렸다(이는 시에나 역사에서 몇 차례 있었던 일이고, 가장 최근은 1944년에 [[연합국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하였다). 전쟁 기간에 시에나 군 통솔권이 주어졌던 보나구이다 루카리(Bonaguida Lucari)는 목 주변 홀터도 하지 않은 머리에도 아무것도 쓰지 않은체 맨발로 두오모로 걸어나갔다. 시에나의 모든 거주민들로 이뤄진 행렬을 이끈 그는 모든 성직자들을 만났다. 루카리와 주교들은 포옹함으로서포옹함으로써, 교회와 나라의 통합을 보여줬고, 그후 루카리는 공식적으로 시에나와 콘트라다를 성모에게 받쳤다. 전설에 따르면 전장에서 짙고 하얀 구름이 시에나군을 덥어 그들의 공격을 도왔다고 한다. 실상은 피렌체군이 전투 당시에 시에나군에게 성과없는 몇 차례 공격을 펼쳤고, 그후 시에나군의 맹렬한 반격과 피렌체군에 있던 배반자가 군 지도자를 암살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피렌체군은 와해되어 전장에서 이탈하였다. 결과적으로 피렌체군의 절반 가량(약 15,000 명)이 사망하였다. 이 충돌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두 도시가 스포츠 경기에서 만나게 되면, 시에나 관중들은 피렌체 관중들에게 "몬타페르티를 기억하라!"라고 외친다.
 
=== 쇠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