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룽 (189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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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룽''' ({{zh-st|s=贺龙|t=賀龍}}, [[1896년]] [[3월 22일]] – [[1969년]] [[6월 8일]])은 [[중국 공산당]]의 공산주의자이자 군사지도자 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원수]]의 직위까지 올랐다.▼
▲'''허룽''' ({{zh-st|s=贺龙|t=賀龍}}, [[1896년]] [[3월 22일]] – [[1969년]] [[6월 8일]])은 [[중국 공산당]]의
허룽은 [[1896년]] [[후난 성]](湖南省) 상식현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무인으로 16세 때 이미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기 위해 산속에서 부하들을 모으고 무장세력을 규합하는 '의적(義賊)'이 되었고 21세 때에는 휘하에 1만9천명의 병력을 거느리는 농민군의 장군이 되어있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을 폭도에서 사면한 뒤 돈을 주고 해산시켰다.▼
▲허룽은 [[1896년]] [[후난 성]](湖南省) 상식현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무인으로 16세 때 이미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기 위해 산속에서 부하들을 모으고 무장세력을 규합하는 '의적(義賊)'이 되었고 21세 때에는 휘하에 1만9천명의 병력을 거느리는 농민군의 장군이 되어있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을 폭도에서 일반군사로 사면한 뒤 돈을 주고 해산시켰다.
허룽은 [[쑨원]] 박사와 손을 잡으려 하였고 제1차 국공합작이 진행되던 1926년 [[중국 국민당|국민당 군]] 제20군단장이었는데 이 때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8월 1일]] [[저우언라이]]·[[주더]] 등과 함께 [[난창 봉기]]를 일으켰고 당시 [[홍군]] 제2방면군을 총지휘하였으나 봉기가 실패한 후 상하이로 달아났다가 후난성 일대에서 게릴라 군사 활동을 지휘하였다. 1936년에는 [[마오쩌둥]]과 [[장궈타오]]의 분쟁에서는 마오의 편을 들어 장궈타오의 패배를 결정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
▲허룽은 [[쑨원]] 박사와 손을 잡으려 하였고 [[제1차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로군|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고 이후 [[중일전쟁|항일전쟁]]과 [[제2차 국공내전]]의 모든 기간중에 야전군 사령으로 있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요직을 거치고 1955년 [[인민해방군]] 원수가 되었다. 군사위 부주석, 1956년 제8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을 역임하고 [[문화대혁명]] 때 실각되었다가 [[1969년]] 죽었다. 1974년 명예회복되었다. ▼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로군|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고 이후 [[중일전쟁|항일전쟁]]과 [[제2차 국공내전]]의 모든 기간중에 야전군 사령으로 있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분류:1896년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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