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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이토의 경질에 찬성해 이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으나, 이토가 귀국한 후 정계로 복귀할 것을 우려한 [[일본의 총리|총리]] [[가쓰라 다로]]는 찬성파에서 이토의 유임을 주장하는 등 경질은 난항을 겪었다. 이토는 위기에 닥치자 [[1909년]] [[4월 10일]]에 가쓰라 총리와의 회합에서 병탄의 단행에 이의가 없다고 표명하여 여론의 전환을 도모했다. 하지만 여론의 악화를 이기지 못한 이토는 [[6월 14일]]에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직을 넘기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결국 친일파세력인 일진회의 한국 병합 촉진 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진회는 지속적으로 한일병탄을 탄원하였으나 이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당시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의 의사를 왜곡한 것에 불과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면서 이토의 동양평화론이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거짓 평화론이라 주장하였다. 게다가 병탄 가속화시에 주도권을 잃는 것을 우려한 이완용 내각도 일진회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진회는 [[12월 4일]]에 [[일한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 황제와 총리대신, 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했다.
[[1910년]] [[5월 30일]]에 일제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한국통감으로 겸임시키고, 한국 병탄을 진행시켰다. [[6월 30일]]에는 유명무실하던 한국 경찰을 일본 한국주재군 헌병대에 통합시켜 폐지하였다. [[7월 23일]]에 한국에 도착한 데라우치는 [[8월 16일]]에 이완용과 함께 병탄 늑약 체결을 진행시켰다. [[8월 18일]]에는 별다른 수정 없이 병탄늑약안이 한국의 각의를 통과했고, [[8월 22일]]에는 형식적인 어전회의에서 이완용이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같은 날 늑약이 강제로 조인되었다. 그리고 [[8월 29일]]에 [[한일 병합 조약]]이 공포되었다.
== 역대 통감 및 부통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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