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175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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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회를 세우다 ===
마침내 [[1785년]](정조 9년) 봄 명례동(明禮洞 :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처음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세웠다. [[이벽]]·[[이가환]] 및 [[정약용]]·[[정약종]]·[[정약전]] 3형제와 함께 주일 [[미사]]와 [[강론]]을 행하면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천주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정약전]]·[[최창현 (1754년)|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다.([[1786년]], [[가성직제도]])<ref>{{백과사전 인용|제목 = 권일신|백과사전 = 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확인일자 = 2016-02-08|url = http://100.naver.com/100.nhn?docid=24352 |인용문=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권일신과 이승훈 등은 1786년부터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성직제도를 만들어 운영하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이승훈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권일신·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이 사제로서 각 지역에서 성사를 집전했다.}}</ref><ref>[[#이덕일 (2009)|이덕일 (2009)]] 441쪽.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權日身, 정약전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는데, 이를 정식 신부가 맡은 체제가 아니라는 뜻의 가성직 체제라고 한다."</ref> 그는 [[1790년]] [[음력 10월]]에 음서로 비로소 관직에 나가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고<ref>《[[승정원일기]]》, 정조14년 庚戌 10월 2일조.</ref> [[1791년]](정조 15년, 신해년) 2월 서부도사를 거쳐<ref>《[[승정원일기]]》, 정조15년 辛亥 2월 9일조.</ref> 이 해 6월에 평택현감이 되기도 하였으나, <ref>《[[승정원일기]]》, 정조15년 辛亥 6월 24일조.</ref> 마침내 [[천주교]]의 전국적 전파를 막으려는 조정의 탄압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나 관직이 박탈되었다.(음력 11월)<ref>[[#정조실록 1805|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08_006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ref> [[1795년]] [[주문모]] 신부 입국 사건으로 충남 [[예산군]]에 유배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 [[1868년]] 그의 뒤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순교]]하고, [[1871년]] 증손까지 순교하여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ref name="글로벌">《[[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종교의 새 기운/천주교의 전파와 교세 확대#이승훈|이승훈]]〉 </ref>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