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비판을 지우는 이유가 있나요?
편집 요약 없음
128번째 줄:
** [[8월 폭풍 작전]]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년]] ~ [[1989년]])
 
== 비판 ==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이 1945년 8월 이후 5개월간 [[한반도]]의 군정 기간에 드러낸 행태를 기록한 문건이 발견되었다. 문건에는 “우리 군인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당시 소련군의 만행을 이같이 기술했다. 그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 극동군 연해주 군관구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규정하며 “조선 인민들이여,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행복은 이제 여러분 손 안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북한에서 소련군이 한 약탈과 관련해 봉기가 일어난다면 “조선사람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군내 질서를 잡고 25군단 내 정치적 도덕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시급히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된다”며 “시범 케이스로 처벌한 뒤 이 사실을 널리 전군에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대학원대학교 신종대 교수는 “소련군 역시 미군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진주했고 진주 후에도 현지 사정에 무관심했다”며 “이는 북한 진주 초기 소련군의 비행과 풍기문란이 심각했음을 잘 보여주는 문건”이라고 말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100310/26736705/1 1945년 北 진주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해방군 아닌 약탈군이었다] 2010년 3월 10일 동아일보</ref>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