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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허멍슝(何孟雄)과 린위난(林育南)과 연합하여, 리리싼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여 지위에서 해임당하고 [[장쑤 성]]으로 좌천되었다. 1930년 코민테른은 저우언라이와 [[취츄바이]]를 파견하여 리의 좌익모험주의를 교정하려고 했고, 리리싼은 지위를 잃고 모스크바로 소환당했다. 12월 파벨 미프가 다시 코민테른의 특사로 파견되어 왕과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을 강하게 지지하여 그들을 당의 지도적위치로 올렸고, 파벨 미프가 중국에 머물던 1년동안 왕은 그를 보좌하며 중국공산당에 큰 영향력을 미칠수 있었다. 이후 [[샹중파]]등의 당의 고참그룹 30여명인 상하이에서 열린 비밀회의에 참여하다 국민당에 체포되었고, 왕은 이러한 지도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왕은 건강상 이유로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왔지만, 이후 열린 당대회에서 그를 추종하는 "28인의 볼셰비키"그룹이 대거 당정치국에 진입하여, 그는 당에 영향력을 끼칠수 있었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파견된 중국공산당을 대표를 맡았고 코민테른에서도 고위직에 올랐다. 그동안 당권을 장악한 [[보구]] 등의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은 [[마오쩌둥]]과 [[주더]]의 게릴라전술을 버리고 국민당군의[[국민혁명군|국민당군]]의 제5차 토벌전에 정규전으로 맡섰다가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때문에 당은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대장정]]을 결정하게 되었고, 대장정 중 열린 [[준이 회의]]에서는 [[장민텐]], [[왕자샹]], [[양상쿤]]등의 주요멤버가 마오의 편에 서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이 붕괴하고 [[마오쩌둥]]에게 당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된 이후, 1937년 왕은 코멘테른의 명령으로 [[옌안]]으로 돌아왔다. 당권을 잡고 있었던 마오는 코민테른의 후광을 업은 왕을 존중하는 척 했고, 왕은 공산당 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오를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을 포함한 항일통일전선을 지지하는 왕과, 공산당의 독자적 노선을 지지하는 마오는 결국 대립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여 소련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위해 코민테른이 해체되자, 왕은 주된 지지기반을 잃었고 특히 1942년 마오가 [[정풍운동]]을 주도하여 교조주의자들을 공격하자 왕은 주된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급격히 당에 대해 영향력을 잃고,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까지 나빠졌으며 당대회에서 자아비판하는 수모를 감수할 할수밖에 없었다. 이때 소련의 개입으로 더이상의 박해는 당하지 않았고 공산당 지도부에 머물수 있었지만, 이미 그의 공산당에 대한 영향력은 거의 미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