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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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중화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중화인민공화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출처 필요|날짜=2013-5-11}}
이 문서는 '''[[중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다룬 문서이다. [[중국]]에서도 [[한국]]과 같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천주교'''(天主教)라고도 부른다. 천주교라는 명칭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기독교]]에서 [[흠숭]]하는 유일신 [[하느님]]을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를 통해 '천주'(天主)로 번역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천주실의는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이 천주교를 수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영향을 주었다.
 
== [[국공 내전]] 이전 (16세기 ~ 19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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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기 동안 가톨릭교회는 중국인들에게 종교적으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가톨릭교회가 죽은 가족에게 제사를 바치며 예를 표하는 중국 현재의 유교적 관습을 미신행위로 보고 엄격하게 금지한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조상 제사는 옛날부터 내려온 미풍양속이었지만, 교황청에서 바라볼 때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우상숭배에 불과했다. 그 결과, 중국 내에서 가톨릭교회의 교세는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조상 제사 금지에 관한 교황청의 가르침은 20세기에 와서 바뀌게 되었다. [[교황 비오 12세]]가 1939년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통해 조상 제사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조상 제사에 대해 관용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교황청 포교성은 《이제는 분명히(Plane Compertum)》라는 담화문을 통해, 중국인 신자들에게 조상 제사가 거행될 때 단순히 사회적 관습의 의미로만 거행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되지만, 만일 그 예절 속에 종교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가 있을 경우에는 소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당부하였다. 교황청이 이렇게 조상 제사를 부분적으로나마 허용한 배경에는 조상제사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 사회 문화적 풍속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천주교]]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는 조선의 초기 천주교도들이 시행하고 있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을 어긴 사실에 대해서는 책망했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은 칭찬했으며, 조선에 천주교 신부를 보내 주기로 하는 한편, 그는 조선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1790년]]) 북경 교구는 조선에 [[청나라]] 사람 오 신부를 보냈으나([[1793년]]) [[신해박해]](1791년)의 여파로 조선 입국에 실패한 후 병사하였다. 재차, 구베아 주교는 외모나 분위기가 [[조선]] 사람과 매우 닮은 [[주문모]] 신부를 선교사로 파송한다(1794년). 주문모 신부는 [[세례]]와 [[미사]]집전, 지방 전도 등의 천주교회 선교사로서의 소임을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실천하였다.
 
[[1805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천주교회도 역시, 제사를 금지한 천주교회를 [[중국]]의 전통을 파괴하는 무리로 본 중국사회의 저항으로, 천주당(天主堂, [[중국]]에서 천주교 성당을 가리키는 말)과 [[신학교]]가 파괴당하는 등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를 보낼 여유가 없어졌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1836년]] [[1월 12일]] ([[1835년]] [[음력 11월 24일]])한 후, 모방 신부는 유방제 신부를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조선에서 선교 중이던 [[피에르 모방]] 신부는 [[김대건]]·[[최양업]]·[[최방제]]를 [[마카오]] 신학교에 보내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는 모방 신부가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ref>{{저널 인용 |저자=박해진 |날짜=1994 |제목=역사탐방 :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 김대건과 민영환 - |url=http://kiss.kstudy.com/journal/thesis_name.asp?tname=kiss2002&key=1776811 |저널=도시문제 |출판사=대한지방행정공제회 |권=29 |호=302 |doi= |쪽=128|확인날짜=2016-02-13|인용문=조선에서 가까운 北京에 유학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마카오까지 가게 된 데는 모방신부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방신부는 처음부터 北京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그렇게 탐탁스럽게 여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카톨릭정통의 맥을 이어받지 못하고 어딘가 世俗化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ref>
 
1842년에는 프랑스로부터 선교사 클로드 고틀랑([[:fr:Claude Gotteland|Claude Gotteland]]) 신부, 프랑수아 에스테브 신부, 그리고 [[벤자멩 브뤼에르]]([[:fr:Benjamin Brueyre|Benjamin Brueyre]]) 신부가 [[상하이]]에 도달하였다.(6월 12일)<ref>[[#앙리 코르디에 (1921)|앙리 코르디에 (1921)]] [http://dsr.nii.ac.jp/toyobunko/Y-III-7-8/V-4/page-hr/0112.html.ja 112쪽]. "Enfin, le 12 juin 1842, le P. Claude GOTTELAND, de Savoie, et le P. François ESTÈVE, de Paris, arrivèrent à Chang Haï, suivis le 23 octobre du P. Benjamin BRUEYRE resté aux Chou San, alors occupées par les Anglais ; ces trois missionnaires avaient quitté Brest le 27 avril 1841, sur la frégate l'Érigone, commandant CÉCILLE; "</ref>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49년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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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의 로마 가톨릭교회]] - [[마카오]]와 [[홍콩]]에서는 예외적으로 가톨릭교회가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있다.
* [[타이완의 로마 가톨릭교회]]
==각주==
 
<references/>
==참고 문헌==
*{{위키인용 |ref="앙리 코르디에 (1921)"| reference ={{서적 인용 | 저자 = 앙리 코르디에([[:fr:Henri Cordier (orientaliste)|Henri Cordier]]) |제목= 중국 및 외국과의 관계에 관한 일반 역사 제4권(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 et de ses relations avec les pays étrangers : vol.4) |출판사=[[:fr:Librairie orientaliste Paul Geuthner|Librairie Paul Geuthner]] |연도=1921 |ref={{sfnRef|앙리 코르디에 (1921)}} }} }}
{{아시아의 로마 가톨릭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