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칼레도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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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서쪽 지역은 약 5만년 전부터 거주가 시작되었다. 그 후 [[오스트로네시안]]이 그 지역에 유입되었다. [[멜라네시아]] 군도에 자리잡은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을 라피타(Lapita)라고 한다. 이들은 기원전 1500년경, 현재의 누벨칼로도니와 프로방스드일로요테({{llang|fr|Province des îles Loyauté}})인 이 군도로 들어왔다. 라피타는 태평양의 넓은 지역에 영향을 준 [[항해술]]과 [[농경]]이 발달하였다. 11세기부터 폴리네시아인이 유입되어 멜라네시아 군도의 사람들과 섞였다.
 
유럽인들은 18세기 후반에 누벨칼레도니와 프로방스드일로요테를 발견하게 되었다. 즉, [[1774년]] 뉴질랜드에 가는 길에 이 곳 그랑드 테르({{llang|fr|Grande Terre}})를 발견한 영국의 항해가 [[제임스 쿡]]선장은 자신의 출생지의 스코틀랜드를 기념하여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 칼레도니아는 스코틀랜드의 라틴어식 옛이름이다.)라고 불렀다. 이 항해에서 그는 누벨칼레도니의 북쪽에 있는 섬([[바누아투]])을 뉴 헤브라이즈[[뉴헤브리디스]](the New Hebrides)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북쪽에 있는 섬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 후 [[1778년]] 프랑스의 라 페루스 탐험대가 찾아온 이래 영국-프랑스 양국의 식민정책의 쟁점이 되었다. 유럽인들은 [[천연두]], [[홍역]], [[이질]], [[인플루엔자]], [[매독]], [[한센병]]과 같은 새로운 질병들을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병들로 죽어갔다. 긴장감은 적대심으로 발전하였고, [[1849년]] 포우마(Pouma) 부족은 커터(Cutter)호의 선원을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기에 이른다.
 
백단목 무역이 쇠퇴하자, 새로운 형태의 무역인 노예무역(blackbirding)이 이를 대체하였다. 노예무역은 누벨칼레도니, 프로방스드일로요테, [[바누아투]], [[파푸아뉴기니]], 그리고 [[솔로몬 제도]]의 사람들을 노예로 하여 [[피지]]와 [[퀸즈랜드]]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영어 "blackbirding"은 이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무역은 20세기 초반에 중지되었다. 이 범죄의 희생자를 "Kanakas"라고 불렸는데 프랑스에 합병된 뒤에는 이 원주민들을 "Kanak"이라고 줄여서 불렀다.
 
이 섬은 [[1853년]] 말 [[나폴레옹 3세]]에 의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이것은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에 대한 경계의식 때문이었다. 가까이의 [[오스트레일리아영국]]에서 [[영국오스트레일리아]]에서 했던 것처럼, 프랑스는 [[1864년]]부터 [[1922년]]까지 이 섬 남서 해안을 따라 세워진 유형지에 모두 2만2천명의 중죄인들을 보냈다. 이 숫자는 일반적인 범죄자 뿐만 아니라 파리의 사회주의자, 카빌레 민족주의자와 같은 정치범들도 포함한 것이었다. 이 섬의 유형지로서의 역할이 끝날 무렵, 범죄자가 아닌 유럽 이주민들(전에 죄수였던 자를 포함한다.)과 아시아 출신의 계약 노동자들이 강제 노역으로 끌려온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같은 기간 원주민인 카낙의 숫자는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이곳에 새로 들어온 질병과 "코드 드 랭디제나"(Code de l'Indigénat)라고 불리던 인종차별정책과 유사한 시스템 때문이었다. 이 시스템은 그들의 주거, 이동의 자유, 토지의 소유에 관하여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및 연합군은 동남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로 전진해 오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누벨칼레도니에 주요 기지를 세웠다. [[누메아]]는 태평양에 있어서 미군 사령부의 역할을 하였다. 남태평양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잇점이 있어 미군의 군함을 누메아에서 신속하게 수리할 수 있었다. 미국 제23보병사단은 아직도 비공식적으로 "Americal"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America"와 "New Caledonia"을 축약한 것이다. 미군의 사령부로 쓰였던 오각형의 복합건물은 전쟁 후에는 "남태평양위원회"라는 새로운 지역적 국가간 개발기구로 넘어갔다. 이 남태평양위원회는 후에 태평양공동체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