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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집안이 비천하였으나, 연주목[[연주 (兗州牧중국)|연주]][[자사 (관직)|목]] [[조조]](曹操)가 종사(從事)로 발탁하였다.
 
[[흥평]] 원년([[194년|194]]), 조조가 [[서주 (중국)|서주]](徐州)를 정벌 중이던 때에 [[장막 (후한)|장막]](張邈) · [[여포]](呂布) 등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주의 속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설제는 [[정욱 (조위)|정욱]](程昱)과 함께 조조가 돌아올 때까지 견성(鄄城) · 범(范) · 동아(東阿) 세 현을 지켜냈으며, 태산태수(泰山太守)[[태산군|태산]][[태수]] [[응소]](應劭)가 군을 버리고 달아나자 스물두 살의 나이로 그 후임이 되었다.
 
[[진교 (조위)|진교]](陳矯)는 [[진등]](陳登)의 요청으로 허(許)에 갔을 때 태산에 들러 설제와 교류하였다. 당시 진교는 공조(功曹)일 뿐이었으나, 설제는 직위를 따지지 않고 진교와 친하게 지내었다. 또 설제는 [[고당륭]](高堂隆)을 독우(督郵)에 임명하였는데, 독군종사(督軍從事)가 언쟁을 벌이던 중 설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ref>당시 상대방의 이름자를 입에 담는 것은 금기시되었으며, 그 대신 자나 관직명 등으로 불렀었다.</ref> 고당륭은 칼을 쥐며 크게 화를 냈으나 설제가 이를 제지하였다. 이처럼 설제는 도량이 넓어 관리들의 모범이 되었다.
 
조조가 [[기주]](冀州)를 평정하였을 때, 설제는 왕국(王國)과 함께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가 훗날 중령군(中令軍)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유수(濡須) 정벌에 종군하였고, 조조가 돌아간 후 호군(護軍)으로서 합비(合肥)에서 [[장료]](張遼) · [[악진]](樂進) · [[이전 (후한)|이전]](李典)을 감찰하였다.
 
한편 조조는 [[한중군|한중]](漢中)을 정벌할 적에 설제에게 명령서가 들어있는 상자를 맡겼었는데, [[건안]] 20년([[215년|215]]), [[손권]](孫權)이 합비를 공격하자 설제는 상자를 열어보았고, “장료 · 이전은 나아가 싸우고, 악진은 호군과 함께 지켜라”라는 명령서의 내용대로 악진과 함께 성을 지켰다.
 
한중 정벌 후 설제는 상서(尙書)가 된 진교의 후임으로 위군태수(魏郡太守)가[[위군]]태수가 되었는데, 항상 충절을 다하여 관용을 베풀고 간단명료한 통치를 하였다.
 
[[황초 (위)|황초]] 원년([[220년|220]]), 후한이 멸망하고 [[조비|문제]](文帝)가 조위를 창건하였다. 이때 설제는 왕사(王思) · 극가(郤嘉) 등과 함께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청룡 (위)|청룡]] 5년([[237년|237]]), 진교의 뒤를 이어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