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188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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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912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원속성과를 졸업했으며, 보은공립보통학교 부훈도(1912년 4월 1일 임명), 청주공립보통학교 부훈도(1913년 ~ 1914년), 청주공립보통학교 훈도(1914년 12월 31일 임명), 용산리공립보통학교 훈도(1916년 ~ 1917년), 제천공립보통학교 훈도(1918년 ~ 1920년)를 역임했다.
 
[[1921년]]부터 [[1929년]]까지 충청북도 도시학(道視學)을 역임했으며,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충청북도사범학교 교유(敎諭)를 겸임했다.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으며, 1929년 4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수, 1931년 9월 28일 충청남도 내무부 학무과 도이사관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충청북도 내무부 지방과 촉탁으로 근무했으며, [[1935년]] [[7월 20일]]부터 [[1941년]]까지 충청남도 사회주사를 역임했다. 충청남도 사회주사 재직 시절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훈시를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193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과 은배 1조를 받았다. [[1937년]] [[2월 25일]]부터 [[1939년]]까지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를 역임했다.
 
[[1938년]] [[7월 30일]]부터 [[1941년]]까지 충청남도 내무부 사회과장을 역임했으며, 1939년 6월 17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중일 전쟁]] 당시 군인 및 유가족 위문, 국방사상 보급을 위한 인쇄물 편집 및 배포, 애국기 헌납운동, 국방헌금 모금운동에 관한 업무를 적극 수행했으며,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단광욱일장을 받았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40년 9월 30일 고등관 5등, 1940년 11월 15일 종6위에 각각 서위되었으며, [[1942년]] 7월 충북창고(忠北倉庫)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광복 이후에 청주여자중학교 교장, 충청북도 학무국장, [[대한적십자사]] 충북지사장, 북이주조공장(北二酒造工場) 사장, 청주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역임했다.
 
==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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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몰년 미상]]
[[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
[[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
[[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