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간 (당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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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간(高侃, 高偘)
|생애=▼
|그림=
|그림설명=
|매장지= 건릉(乾陵)
|경력= 우효위랑장 → 영주도독 → 좌감문위대장군
|직업= [[장군]]
▲|복무=[[고구려]][[당나라]]
|관련활동= [[여당전쟁]], [[나당전쟁]]
▲|}}
'''고간'''(高侃, 高偘, ? ~ ?)은 [[당나라]]의 [[장군]]이다. [[돌궐]]과의 전쟁, [[여당전쟁]], [[나당전쟁]] 등에서 활약하였다.
=== 차비가한 ===
[[649년]]([[정관 (당)|정관]] 23년) 우효위랑장(右驍衛郞將)으로서 몰래 [[회흘]](迴紇)과 복골(僕骨) 등을 끌어들여 [[돌궐]] 차비가한(車鼻可汗)을 습격했다. [[가라록]]과 처목곤의 추장 가라록니숙궐사리발(歌邏祿泥孰闕俟利發)과 발새복처목곤막하돌사근(拔塞匐處木昆莫賀咄俟斤)이 부락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650년]]([[영휘]] 원년) 아식산(阿息山)으로 나아갔다. 차비가한도 각 부락을 소집하여 대응하려 했으나 응하는 부락이 없어 처자를 데리고 달아났다. 정예[[기병]]으로 추격한 끝에 생포해서 [[수도]]로 보냈다.<ref>《[[구당서]]》194권上 열전 제144上 돌궐上 차비</ref>
=== 여당전쟁 ===
[[666년]]([[건봉]] 원년)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남건]]에게 공격당해 [[귀순]]을 청하였다. [[글필하력]]과 영주[[도독]](營州―) 고간, 방동선(龐同善), [[설인귀]], [[이근행]] 등이 병력을 이끌고 남생을 맞이하였다.<ref>《[[신당서]]》3권 본기 제3 고종 이치 건봉 원년</ref> [[당 고종|고종]]이 [[이세적|이적]]을 필두로 [[고구려]]를 [[제3차 여당전쟁|다시 치기로]] 하였다. [[667년]] 이적이 [[신성 (요동)|신성]] 등 16[[성 (건축)|성]]을 함락하였다. 고간과 방동선이 신성에 있을 때 남건이 보내온 군대를 설인귀가 무찔렀다. 고간과 방동선이 금산(金山)에 이르러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위기에 빠진 순간 설인귀가 그 옆구리를 찔러 물리쳤다.
=== 나당전쟁 ===
[[670년]]([[함형]] 원년) 고구려인 [[검모잠]]이 [[안승]]을 세워 [[고구려 부흥운동|들고일어났다]].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고간이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軍大總管)이 되어 이근행과 함께 검모잠을 쳤다.<ref>《신당서》3권 본기 제3 고종 이치 함형 원년</ref>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671년]] [[안시성]]에 남아있던 무리를 격파하였다. [[672년]] [[평양]]으로 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정복하고 백수산(白水山)<ref>사서마다 지명이 다르다. 《구당서》5권 본기 제5 고종 이치下 함형 3년에서는 횡수(橫水). 《신당서》220권 열전 제145 [[동이]] 고려에서는 천산(泉山)</ref>에서 고구려 부흥군, 그리고 이를 도우러 온 신라군과 싸웠다. 한때 수천 명이 죽어 석문(石門)까지 후퇴했다가 반전하여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관직)|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을 죽이고 승리하였다.<ref>《[[삼국사기]]》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2년</ref> 사후 건릉(乾陵)에 묻혔다.<ref>《[[당회요]]》21권</ref>
== 각주 ==
{{각주}}
== 참고 문헌 ==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22_0020 《삼국사기》22권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분류:생몰년 미상]]
[[분류:7세기 사람]]
[[분류:
[[분류:여당전쟁 관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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