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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흥방, 이인임, 임견미 등은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가노(家奴)들을 보내 수정목(水精木, [[물푸레나무]])으로 만든 몽둥이로 마구 때린 뒤, 관청에서 발급한 증서가 있어도 그 토지를 빼앗아갔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정목 공문(水精木公文)'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염흥방의 가노인 이광(李光)이 [[조반 (1341년)|조반]]의 소유인 백주(白州)의 토지를 빼앗았다. 조반은 염흥방에게 간청하여 이를 돌려받았으나, 이광은 다시 토지를 빼앗았고 조반을 능욕하였다. 결국 조반은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군사 수십 기(騎)를 이끌고 이광의 집을 포위하여 그를 살해한 뒤, 이를 염흥방에게 알리고자 개경으로 향하였다. 이에 염흥방은 크게 분노하여 조반이 반역 음모를 꾸민다고 하여 조반과 그 가족을 체포하게 했다. 염흥방은 조반에게 거짓 진술을 시키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 정치적 사건으로 발전되었고, [[1388년]] [[음력 1월|1월]], 우왕은[[고려 최영과우왕|우왕]]은 [[최영]]과 논의 끝에 조반을[[조반]]을 석방시키고 염흥방을 순군옥에 하옥시켰다. 이어서 임견미와[[임견미]]와 동생 [[염정수]] 등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각 도마다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염흥방, 임견미가[[임견미]]가 탈취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결국 염흥방은 [[임견미]], [[염정수]], [[이성림 (고려)|이성림]]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고, 일가 친척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