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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분'''(田蚡, ? ~ [[기원전 131년]] [[음력 3월]])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경조윤]](京兆尹)장릉현(長陵縣) 사람이다. [[효경황후|왕황후]](王皇后)의 의붓동생이며, 어머니는 연왕(燕王) [[장도 (연왕)|장도]](臧荼)의 딸 장아(臧兒)이다.
 
==생애==
===황제의 총애를 받다===
[[두영]](竇嬰)이 [[대장군]]을 지내던 때에 전분은 제조랑(諸曹郞)이었다. 이때 그는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고, 두영은 전분을 아들처럼 대하였다.
 
[[전한 경제|경제]](景帝) 말년에 전분은 신분이 고귀해져 중대부(中大夫)가 되었다. 또 말솜씨가 좋고 《반우》(盤盂)를 비롯한 [[잡가]]의 서적을 읽는데, 누이 왕황후는효경황후는 전분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경제가 죽고 [[전한 무제|무제]](武帝)가 즉위하니, 전분은 왕황후가효경황후가 황태후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무안후(武安侯)에 봉해졌다. 전분은 빈객을 모아 무제에게 천거하였다.
 
[[승상]] [[위관 (전한)|위관]](衛綰)이 면직되고, 승상과 태위의 후임을 누구로 할지 논하게 되었다. 이때 적복(籍福)이란 자가 전분을 설득하였다.
{{인용문2|위기후(魏其侯)<ref>두영.</ref>는 오래 전부터 신분이 존귀했던 자로, 천하의 선비들이 원래부터 따랐었습니다. 지금 장군은 존귀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위기후만은 못합니다. 그러하니 만약 황제께서 장군더러 승상이 되라고 하신다면, 반드시 위기후에게 양보하십시오. 위기후가 승상이 되면 장군은 반드시 태위가 되실 것입니다. 태위는 승상과 똑같이 고귀하며, 또 장군은 양보할 줄 아는 분이라는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전분은 태후에게 귀띔을 하였고, 결국 두영과 전분은 각각 승상 · 태위가 되었다.
 
회남왕(淮南王) [[유안 (전한)|유안]](劉安)이 [[장안]](長安)에 입조하였을 때, 전분은 유안에게 아뢰었다.
{{인용문2|폐하께 만에 하나 일이 생긴다면, [[전한 고제|고조]](高祖)의 손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대왕 이외에 누가 뒤를 잇겠습니까?}}
유안은 이를 기뻐하여 전분에게 재화를 내렸다.
 
두영과 전분은 유학을 좋아하여, 유학자 [[조관 (전한)|조관]](趙綰)을 [[사공 (관직)|어사대부]]에, [[왕장 (낭중령)|왕장]](王臧)을 [[광록훈|낭중령]]에 임명하였다. 또 노(魯)나라의 [[신배|신공]](申公)을 초빙하여 명당(明堂)을 설치하고 관소를 폐지하여 유학의 예를 따라 복식 제도를 갖추고 열후(列侯)를 봉국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이듬해 조관이 황태후에게 상주하지 말 것을 권하니 두태후는 노하였고, 조관 · 왕장 등을 내쫓고 전분 · 두영을 파면시켰다.
 
===전성기===
 
===관부와의 대립===
전분은 두영의 친구인 [[관부]](灌夫)와 대립하였는데, 서로를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관부가 잔치에서 폭언을 내뱉은 일로 전분은 관부를 죽일 것을 상주하였는데, 두영이 이를 구해내려 하였으나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 이하의 의견이 갈렸고 결국 송사는 아버지가 다른 누나인 태후 [[효경황후]]의효경황후의 노골적인 비호를 받은 전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원광 (전한)|원광]] 4년([[기원전 131년|기원전 131]]), 관부와 두영은 처형되었다.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