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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은 제나라의 반란을 단숨에 제압하지 못하였고, 이에 한신과 장량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진한 한왕에 의해 수도 팽성을 빼앗겼다. 이에 패왕은 [[종리말]] 등에게 주력군을 내려 제나라의 반란을 제압하게 하고 자신은 단 3만의 정예부대로 팽성을 수복하러 간다. 이에 한왕은 자신의 군과 천하의 여러 제후들이 보낸 원군이 보낸 총 병력 60만 대군을 이끌고 팽성에서 패왕와 맞섰는데 이가 [[팽성 전투]]이다. 압도적인 병력 차지만, 패왕은 그 특유의 용맹과 무예로 한왕의 60만 대군을 격파해, 수십만의 제후연합군이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었다. 패왕은 팽성을 수복하였으나, 끝내 고조를 잡지는 못하였다.
 
이후에도 자신의 특출난 장수로써의 실력과 참모 [[범증]](范增)의 계책을 써 고조 유방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 하였으나, 고조에게 투항한 [[진평]](陳平)이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아 결국 항우는 범증을 내쳤고, 이에 상심한 범증이 고향으로 내려간 후 종기에 걸려 죽고 말았다(이를 중국 제 2대 애탄이라 한다). 그 후에도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에선 승리를 하는 등 맹장의용장의 기세를 보였으나, 항우가 유방과 대치하는 틈을 타 하북을 평정한 한신까지 합세하자, 결국 [[해하]](垓下)에서 항우가 이끄는 초군은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군의 포위망에 갇혀있게 되었고 한나라군은 장량의 계책으로 초군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항복하게 하기 위해 초나라 진영을 향해 초나라 민요를 연주하게 하였다. 이에 후세 사람들은 이를 빗대어 위기에 몰린 사람에게 이 계책에서 유래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를 만들어 불렀다.
 
항우는 허탈하고 상심하여 수백명밖에 남지않은 자신의 진영을 둘러보았고, 이에 끝까지 자신과 함께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고향인 [[강남]]으로 향할 수있는 [[오강]](烏江)까지 자신이 그들을 이끌도록 약속한다. 일단 진영을 에워쌌던 100만에 달하는 한군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자 남은 것은 단지 28기 뿐이였다. 항우는 참담하면서도 더욱 악에받쳐 그 28기를 이끌며 강가로 달려갔는데, 그 와중에도 한의 [[관영 (전한)|관영]](灌嬰)이 이끄는 정예병 5천이 추격하였지만, 항우는 그들을 단 28기로 격파하였고, 마침내 오강에 다달아 그때까지 자신을 따르던 강남의 자제들을 모두 강남으로 향하는 배에 태웠는데, 이때 살아남은 기마의 수는 두 명만이 죽은 26기로, 몇천명을 상대로 싸워 두 명만이 죽고 유방과 한신의 지독한 추격을 따돌린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