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오세티야 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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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수상에 의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시행될 때,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에서 [[민족주의]] 봉기가 야기되었고, 조지아는 독립을 향해 나아갔었는데 오세티야 국가주의 조직인 [[아데몬 니카스]](인민 전선)의 반발에 부딪혔다. 1988년에 창립된 아데몬 니카스는 그 지역의 대 자치권을 요구했고 마침내는, 러시아의 [[북오세티야]]와 통일 되었다. 1989년 11월 10일, 남오세티야 [[소비에트 최고회의|최고 소비에트]]는 남오세티야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인 [[북오세티야 차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가 결합하는 결정을 공인했다. 그러나 이튿날, 조지아 SSR 최고 소비에트는 그 결정을 무효화했고 11월 23일, [[즈비아드 감사쿠르디아]]가 이끄는 수 천명의 조지아 민족주의자들과 저항 세력의 지도자들이 회담을 열기위해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로 향했다. 오세티야는 도로에 방해물들을 집결시켰고 [[소비에트 군대|소비에트]] 부대의 간섭으로 두 시위대 간의 충돌은 모면했다. 소비에트 사령관은 조지아의 시위대를 철수하게끔 했다. 그러나 그 직후에 조지아와 오세티야 사이의 충돌에서 여러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1990년 초 쯤에 남오세티야군은 300~400명의 불충분하게 무장된 군인들만 갖고 있었지만, 6개월 후에는 그들의 수가 1,5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남오세티야 소규모 민병대의 주 보급원은 츠힌발리에 기지가 있는 헬리콥터 연대였다.{{출처|날짜=2010-10-05}} 인접 마을들에 거주하는 민족적으로 조지아인인 사람들은 ''메랍 코스타바 회''라고 알려진 자주-방어군을 조직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Understanding Civil War |성= Collier|이름= Paul|저자고리=:en:Paul Collier|공저자= Nicholas Sambanis|연도= 2005|출판사r=World Bank Publications|isbn= 0-8213-6049-3|url=http://www.google.ru/books?id=tyBCW9sA-ekC&dq=Abkhazia&as_brr=1&hl=en&source=gbs_summary_s&cad=0|쪽= 271 }}</ref>
 
조지아 최고 의회는 1990년 여름에 지역 당파들을 제외하고 법률을 채택했다. 그러함은 오세티야인들에게는 아데몬 나카스에 대항하는 조짐으로 해석됐다. 1990년 9월 20일에, 남오세티야 자치주는 [[소비에트 연방]]의 독립 결정을 승인해 달라고 모스크바에게 호소하며 남오에티야 민주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선언했다. 1990년 10월에 조지아 최고 의회 선거가 열릴 때, 남오세티야인들은 그 선거를 배척했다. 1990년 12월 10일, [[남오세티야]]가 그들만의 선거를 열었는데, 조지아는 그 선거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이튿날에 조지아 최고 소비에트는 남오세티야의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고 남오세티야의 자치권을 박탈했다.<ref>[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72214,00.html Hastening The End of the Empire], ''[[:en:TIME Magazine|TIME Magazine]]'', January 28, 199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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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두마]]가 [[남오세티야]] 분리론자들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 [[트빌리시]]와 모스크바 사이의 긴장감은 계속하여 악화되었다. 형제국인 비승인된 국가 [[압하스]]와 러시아의 [[트란스니스트리아]], [[코사크]]의 공동체들과 남오세티야인들는 만일 조지아가 공격해 온다면 남오세티야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주로 [[코사크인]]들로 구성된 수백명의 러시아 지원군들이 분리주의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서 남오세티야에 당도했다.
 
총격과 박격포 공격이 있던 3일 밤이 지나고, 8월 13일에 휴전에 관한 논의가 진전되었다. 조지아의 국무총리 [[주랍 즈바니아]]와 데 팍토 남오세티아 대통령 [[에두아르트 코코이티]]는 휴전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 협정은 서명 후 얼마 못가 위반되었다. 8월 18일과 8월 19일에 유혈 충돌들이 발생했다. 8월 19일에는, 밤샘 전투로 양측 모두 여러 명이 사살되고 부상당했으며, 조지아군은 오세티야가 러시아의 코사크 지원군들이 와주기를 꾹 참고 기다리던 트리아카나의 오세티야인 마을 인근의 여러 전략적인 구릉지들을 포위했다. 그러나, 작전 성공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미헤일 사카시빌리]]는 남오세티야에게 "평화를 위한 마지막 기회"를 주어야 했음을 발표했고 [[트빌리시]]는 총포탄이 오가는 분쟁지에서의 평화를 위해 비-평화유지군 병력들을 철수시켜야 했다고 덧붙혔다. 며칠 후, 조지아 병력들은 분쟁지에 있는 전략상으로 중요한 고지대 꼭대기들을 공동 평화 유지군에게 이양했다. 보고에 의하면,{{출처|날짜=2010-10-05}} 16명의 조지아 군인들과 오세티야인 및 러시아인 지원군들의 12명이 8월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1월 15일, 러시아의 [[소치]]에서 조지아 국무총리 [[주랍 즈바니아]]와 남오세티야 지도자 [[에두아르트 코코이티]] 간의 정상 회담에서, 분쟁지의 비군사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그 분쟁지에서는 돌발적으로 총격이 오가곤 했다.{{출처|날짜=2010-10-05}}
 
=== 새로운 평화적 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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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Saboteurs1.jpg|thumb|left|민병들에게서 압수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 책의 제목은 "[[무자헤딘]] 규범서"라고 쓰여있다.]]
[[Image:Saboteurs2.jpg|thumb|right|민병들에게 압수한 무기들.]]-->
2006년 10월 31일, 남오세티야 경찰은 [[조지아 (국가)|조지아]]의 [[자바 (조지아)|자바]] 구역에서 소규모 접전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한 단체에서 3명의 남성이 사살되었다고 보고했다. 그 단체에서 압수한 무기들은 살상용 저격 소총들, 총기류들, 유탄 발사기들, 수류탄들, 폭파 장치들이 포함돼 있었다.<ref>[http://www.kommersant.com/p718122/r_527/South_Ossetia_Militants_Talks/ ''South Ossetia Announces Thwarting a Terrorist Plot''], Kommersant, November 1, 2006.</ref><ref>[http://euronews.net/create_html.php?page=detail_info&article=388244&lng=1#/ ''Four Chechen gunmen killed in South Ossetia''], [[:en:EuroNews|EuroNews]], November 1, 2006.</ref> 투사들의 장구류들과 군장에서 나온 다른 물품들로는 이슬람권 언어로 된 문헌(한 책의 제목에는 "[[무자헤딘]] 규범서"라고 쓰여있었다), 자바 구역에 대한 지도들, 러시아의 평화유지군 군복 일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습득물에 대한 조사는 투사들이 사보타주를 이행할 계획을 무산시켰고, 그렇게 긴장이 고조되어 [[남오세티야 독립 국민투표|독립을 위한 국민 투표]] 날짜를 2006년 11월로 앞당겼다. 남오세티야 당국은 그 투사들을 다수가 조지아의 [[판키시 계곡]]에서 살고 있는 [[키스트족|키스트]] 체첸인로 판명했다. 남오세티야는 체첸인 용병들을 고용하여 그 지역에서 테러 공격을 자행하게 한 조지아를 고발했다. 러시아는 그에 앞서 조지아가 계곡에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은신처를 제공했다고 고발했다.{{출처|날짜=2010-10-05}}
 
조지아 측은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을 단호히 부인했다. 조지아 내무부 대변인 쇼타 키자니슈빌리아는 그 사건이 남오세티아의 "내부 분쟁"과 연관되었을 수 있었다고 추정했다.{{출처|날짜=2010-10-05}}
 
=== 2006년 경쟁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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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의 새로운 시도 ===
2007년 5월 10일, 트빌리시-후원으로 드비트리 사나코예프가 [[조지아의 대통령]]에 의해 남오세티야의 일시적인 관리상의 실체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날, 사나코예프는 충돌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계획에 대한 윤곽이 담긴 내용을 [[조지아 의회]]에게 전달했다([http://www.civil.ge/eng/article.php?id=15101see 원문]).<ref>[http://www.civil.ge/eng/article.php?id=15100 Head of S.Ossetia Administration Addresses Georgian Parliament]. ''Civil Georgia''. May 11, 2007. Retrieved on May 12, 2007.</ref> 그 활동은 미국 [[미국 국무부|국무부]]의 승인을 획득했지만{{출처|날짜=2010-10-05}}, 츠힌발리의 데 팍도 당국에게 경종을 울렸다.{{출처|날짜=2010-10-05}} 남오세티야 분리주의자들은 무력을 써서라도 사나코예프 정부를 몰아내겠다고 협박했다.{{출처|날짜=2010-10-05}}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러시아의 반감을 샀다.{{모호}}<ref>[http://www.kommersant.com/p764705/Ossetia/ Eduard Kokoity Makes Siege Mistake]. ''[[:en:Kommersant|Kommersant]]''. Retrieved on May 12, 2007.</ref>
 
=== 2007년 치텔루바니 미사일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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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8-08-09
|확인일자=2008-10-05
}}</ref> 조지아는 전차들, 항공기, 중포대, 보병대를 사용하여 탈퇴 공화국에 대한 총-규모적인 밤샘 공격을 시작했다.<ref>[http://en.rian.ru/russia/20080808/115890817.html Russia considers measures to stop violence in S.Ossetia | Russia | RIA Novosti<!-- 봇이 따온 제목 -->]</ref> 대중매체의 보도 자료에 의하면 조지아의 [[다연장 로켓포|MRLS]]가 분리주의 수도 츠힌발리에 포격을 개시했다고 한다. 남오세티야 당국과 다른 기관들은 "아이들, 노인들, 젊은 여성들까지 포함된 남오세티아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대학살 계획"을 실행에 옮긴 조지아를 고발했다.<ref>(http://www.youtube.com/watch?v=wsH3n4BNktU YouTube - A reporter about the bombing of Tskhinvali<!--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www.youtube.com/watch?v=XasDmPo9RxY YouTube - GENOCIDE: Georgia is killing innocent ossetian people<!-- 봇이 따온 제목 -->)</ref> 츠힌발리의 중앙 병원, 대학교<ref>http://s1.imgdb.ru/2008-08/11/P1010566-jpg_ztbqg6yn.jpg</ref> 및 몇 군데의 학교들이 타격을 입기도 했다.{{출처|날짜=2010-10-05}}
 
조지아군은 중포들(122mm(5인치)와 152mm [[BM-21]]),<ref>{{뉴스 인용| url=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8/08/16/AR2008081600502_pf.html | 뉴스=The Washington Post | 제목=A Two-Sided Descent Into Full-Scale War | 이름=Peter | 성=Finn | 확인일자=2010-10-05}}</ref> 전차들,<ref>(http://eng.kavkaz-uzel.ru/newstext/engnews/id/1226981.html Georgian tanks and infantry invade Tskhinvali<!-- 봇이 따온 제목 -->)</ref> 항공기{{출처|날짜=2010-10-05}}의 강력한 군사력 지원으로 느닷없이 공격을 퍼부었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08/aug/09/georgia.russia | 뉴스=The Guardian | 위치=London | 제목=Prisoner of the Caucasus | 날짜=2008-08-09 | 확인일자=2010-10-05}}</ref>
 
[[인권 감시]](HRW)의 연중 보고서에 따르면, 군사 충돌이 벌어지던 기간 동안에 조지아 군대는 남오세티야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츠힌발리]]의 민간인들이 정착한 아파트 단지들은 물론이고 민간인들이 있던 여러 건물들에 분별없이 군사력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지아 군사는 민간인 지역들의 위치들을 표적으로 두고 파괴할 목적으로 그라드 다연장 로켓포, 마구잡이된 무기들을 사용했다고 [[인권 감시|HRW]]는 주장했다.<ref name=worldreport2009>[http://www.hrw.org/sites/default/files/reports/wr2009_web.pdf HRW world report 2009]</ref> 조지아 측이 클래스터 폭탄 사용을 승인 했던 이유는, 로키 터널에 진입한 러시아 병력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