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문익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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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전후 ===
{{참고|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사헌부]][[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을 때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으로 있던 [[유성룡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과 화의 교섭을 했으나 실패, 결렬되었다.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중 [[1593년]]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을 수행하였고,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특히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울]]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4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의 아내 한산 이씨는 왜군에 포로로 사로잡혔고, 왜군에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