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 (제무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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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군이 발생하자, 호걸들을 불러모으고 매부 [[등신]](鄧晨)에게는 신야로, 광무제와 [[이통 (차원)|이통]](李通) · 이질(李軼)에게는 완으로 가서 거병하게 하고 자신은 용릉의 자제들을 모아 거병했다. 스스로 주천도부(柱天都部)를 일컫고 신시병과 평림병과 합류해 녹림당의 산하에 들어갔다. 거병 초기에 [[남양군 (중국)|전대]]대부 견부(甄阜)·속정 양구사(梁丘賜)와 싸워 대패해 누나 [[유원 (신야절의장공주)|유원]]과 아우 [[유중 (노애왕)|유중]](劉仲)을 잃었고 종중 수십 명을 잃고 처음에 확보한 극양(棘陽)을 지켰다. 유인이 지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돌아가려 했으나 유인이 설득하고 견부와 양구사가 치중을 둔 남향(藍鄕)을 습격해 치중을 죄다 뺏은 다음에 견부와 양구사를 쳐 무찌르고 추격해 견부와 양구사를 베었다. 신나라의 납언장군 엄우(嚴尤)와 질종장군 진무(陳茂)도 크게 무찌르고 완을 포위하면서 주천대장군(柱天大將軍)을 일컬었다.<ref name="hh14">범엽: 《후한서》 권14 종실사왕삼후열전제4 중 제무왕전{{위키문헌|:zh:後漢書/卷14|후한서 권14 종실사왕삼후열전제4}}</ref>
 
견부와 양구사를 죽인 뒤로 인망이 높아져 황제로 추대하려는 여론을 얻었으나, 신시병과 평림병은 유인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유인의 족형으로 평림병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나약한 [[한 경시제|유현]]을 옹립할 의사를 밝혔다. 유인은 분쟁이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신시병과 평림병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현이 즉위하고 시호를연호를 [[경시 (更始)|경시]]라 하니, 곧 경시제다. 유인은 대사도가 되고 한신후에 봉해졌다. 평림병이 신야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는데, 신야재<ref>현의 재(宰)는 신나라의 지방관으로 현의 장관이며, 전·후한의 영(令)에 해당한다.</ref> 등성언(鄧城言)은 사도에게라면 항복할 것이라 하고 이에 유인이 가서 등성언의 항복을 받았다. 5월에 완을 함락했고, 6월에는 광무제가 [[곤양 전투]]에서 신나라를 크게 무찔러, 형제의 주가는 더욱 드높아졌다.<ref name="hh14"/>
 
이에 불안해진 경시제와 경시제의 신하들은 유인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장수들을 모았으나, 수의어사 신도건(申屠建)이 옥결(玉玦)<ref>패옥 결(玦)은 결단할 결(決)과 음이 같아 세운 계획을 실행하도록 결단하라는 신호로 쓰인다.</ref>을 경시제에게 보였음에도 경시제가 감히 실행하지 못하고 모임이 파했다. 번굉(樊宏)이 신도건의 행위를 말해주었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원래 유인과 함께 거병한 이질은 이 당시에는 경시제의 측근으로 있어 광무제가 이질을 주의하도록 권했으나 이도 듣지 않았다. 당초 유인 대신 경시제가 옹립된 것에 반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 유인의 종중에 있는 장수 유직(劉稷)이 공공연히 경시제에 반대했다. 유직의 용맹함을 꺼린 경시제는 병사 수천 명을 보내 유직을 사로잡고 죽이려 했다. 유인은 유직을 위해 경시제와 다투었고, 이질 · [[주유 (소부)|주유]](朱鮪)가 이를 기회로 유인도 함께 죽여버리자고 해 경시제에게 사로잡혀 죽었다.<ref name="hh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