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 (회남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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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한 고조]](漢高祖) 유방의 서자인 회남여왕 [[유장 (회남여왕)|유장]](劉長)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장은 큰아버지 [[전한 문제|문제]]에게 반역했다가 사로잡혀 유배 길에 자결했는데,<ref name="h44">반고: 《[[한서]]》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제14{{위키문헌|:zh:漢書/卷044|한서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제14}}</ref><ref name="h14">위와 같음, 권14 제후왕표제2{{위키문헌|:zh:漢書/卷014|한서 권14 제후왕표제2}}</ref> 문제는 유장을 불쌍히 여겨 문제 8년([[기원전 172년]]) 5월에 유장의 네 아들(유안, [[유발 (제북정왕)|유발]], [[유사 (형산왕)|유사]], 유량)을 후로 봉했다. 유안은 이때 부릉후(阜陵侯)에 봉해졌다.<ref name="h44"/><ref name="h15u">위와 같음, 권15 왕자후표제3상</ref> 문제 16년([[기원전 164년]]), 회남국을 셋으로 나누어, 유장의 아들들 중 죽은 유량을 제외하고 모두 왕으로 봉하였는데, 유안은 이때 회남왕으로 봉해졌다.<ref name="h44"/><ref name="h14"/><ref name="h15u"/>
 
[[전한 경제|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가담하려 했으나, 승상이<ref>경제가 취임한 지 한 해 남짓 지나 [[장석지]](張釋之)가 취임한 기록이 보이는데, 유안을 겁박한 승상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ref> 스스로 장수가 되기를 청하고는 왕의 뜻을 거스르고 한나라 편을 들어 가담하지 못했고, 한나라에서 또 회남국에 구원군을 보내 회남국은 반란 후에도 온전할 수 있었다.<ref name="h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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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나라 조정은 제후왕의 권력을 줄여서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전한 무제|한 무제]]의 즉위와 더불어 그러한 정책은 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기원전 122년]] 한나라 조정은 중앙집권정책을 군신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추진하려고 하였다. 문학을 애호하는 회남왕의 궁정에 기거하였던 빈객과 학자 중에는 이와 같은 한나라 조정(漢朝)의 정책에 반발하는 자가 많았으며 그 이유 때문에 유안도 모반의 음모가 있다는 혐의를 받아 자살하고 그의 봉지는 몰수되었다.
 
==주석 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