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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강소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으로 그는 [[난징]]의 공업학교에 보내졌고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학에서 1년간 수학했다. 귀국후 그는 학교에서 가르쳤고 좌익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루오푸(洛甫)''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구전들을 번역했다. 진운의 추천으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1926년부터 1930년 까지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당시 그 대학의 교장이자 [[코민테른]]의 중국 담당관이던 [[파벨 미프]]의 영향을 받았다.
 
1928년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1931년 [[상하이]]로 돌아와 정치국원, 중앙위원회 조직국장이 되었다. 미프의 영향을 받는 이른바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일원으로 [[마오쩌둥]]의 '농민노선'과 [[장시 성]]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정책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1934년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정책 실패로 [[대정정대장정]]을 떠나게 되고 장은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노선을 지지함으로 마오를 지도자로 선출하는데 힘을 보탰다.
 
[[예안옌안]]에 도착한 이후 장민텐은 사상 및 선전분야에서 일했고 청년들을 교육하는데 큰 영향을 준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 시기 마오가 [[왕밍]] 및 [[장꿔타오장궈타오]]와 권력투쟁을 벌일 당시 마오와 연합하는 서약을 하여 [[1945년]] 마오가 당권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 그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중일 전쟁]]이 끝나자 장민텐은 [[린뱌오]]와 함께 [[만주]]로 가서 만주를 [[중국 국민당]]에 저항하는 거점을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중화인민공화국]]수립이후 수립 이후 그는 초대 주 [[소련]]주재 대사가 되어 1955년까지 활동했다. 1959년 마오의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으며 1966년 정치국원으로부터 해임되었고 [[문화혁명]]의 고아풍속에서 [[펑더화이]], [[류사오치류샤오치]]의 일당으로 지목받고 시골로 추방당하였다. 그는 노년에 심장병으로 고통받았고 추방당해 있던 [[장수 성]]의 시골병원에 산소공급장치가 없어 마오쩌둥에게 [[베이징]]에서 치료받게 해달라는 탄원을 올렸으나 마오는 거절했다. 결국 장은 1976년 병으로 죽었다.
 
[[1978년]]에 사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