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연구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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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1965년]]에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의 요청으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존슨]]과의 합의에 의해서 발기된 이 연구소는 [[미국]]의 바텔 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와의 기술적인 자매기관으로 출발이 촉진되어, 1966년에 착공, 3년 만인 [[1969년]]에 준공됨으로써 동양굴지의 대연구소로 그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65에이커의 우거진 숲속에 총면적 100만㎡가 넘는 10여 동의 빌딩에 완전한 시설을 갖춘 이 연구소는 내자 36억 1천만 원과 외자 918만 8천 달러를 투자하여 제2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 기간 중 가장 큰 규모의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것 중의 하나이다. 연구소장과 행정·연구·기술 협력 부문의 세 부소장 밑에 있는 11개의 부속기구의 중추를 이루는 것은 32개의 완전한 시설을 갖춘 연구실과 실험실이다. 거기에는 고온자료연구실, 고체물리연구실, 조선 및 해양연구실, 식량자원연구실, 응용미생물연구실, 종합체연구실 등 현대과학의 첨단을 걷는 여러 분야가 포함되어 있고, 박사 학위를 가진 50여 명의 젊은 과학자들을 포함한 300여 명의 연구원들이 일하여 왔다. 세계적 수준의 연구소로 발전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은 이 연구소가 설립된 지 수년 만에 거의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동양 굴지의 싱크 탱크(think tank)로서 정평 있는 존재가 되었다. [[1971년]]도에 연구 용역 계약고 5,000만 달러를 돌파한 KIST는 주로 다음과 같은 사업에 대한 중점적인 연구 개발과 사업을 촉진하여 왔다.
 
이러한 KIST는 [[1981년]] [[한국과학원]](KAIS)과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되었다.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분리되어 "한국과학기술연구원"으로 독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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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2009년에서 2011년 사이의 기초기술연구회 인력을 실제 인원보다 매년 36∼50명씩 과다 보고하여 직원 성과급 등으로 인건비 58억원을 부당 집행하였고 감사원의 감사를 통해 드러났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30506004575&ctg1=01&ctg2=&subctg1=01&subctg2=&cid=0101080100000 KIST, 인원 부풀려 성과급 잔치]박세준《세계일보》2013-05-06</ref>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