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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는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濟)가 과거에 모욕하였던 식객인 범저(范雎)가 진나라로 망명하였고, 범저가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를 시행할것을 요구하였고, 범저가 진나라 신하로 등용되자, 진나라가 위나라에게 압박하며, 위나라는 상앙처럼 범저를 중용하지 않아서, 진나라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러나 위공자(魏公子) [[신릉군|위무기]](魏無忌)가 [[기원전 247년]]에 육국(六國)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 군을 물리쳤다. 후에 [[신릉군]](信陵君)으로 봉작을 받고, 전국시대의 사공자에 꼽힐 만큼 거물이 된 신릉군은 명성을 얻었다. 그 후에 멋대로 위나라 군대를 함부로 움직였다고 규탄을 받고서 조나라에 도망을 쳤다. 후에 위나라에 소환되어도 위나라의 높은 관리가 되는 것을 멀리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술에 인해서 사망하였다. 신릉군이 사망하고는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저항을 못하고 위나라는 차례로 영토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 결국 [[진 (춘추전국) |진나라]]가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성이 침수당하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 정치 ==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은 유명하다.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이기도 했다.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집권국가가 되자, 덕의 이념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즉,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서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의 이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 관개사업 추진에 의해 다른 6국에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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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위 경민왕|경민왕]](景閔王) || 오(午) || [[기원전 243년]] ~ [[기원전 2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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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 [[위왕 가|가]](假) || [[기원전 228년 ]] ~ [[기원전 2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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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references/>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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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전국 시대]]
[[분류:진나라 (춘추 시대, 晉희성)]]
[[분류:전국 칠웅]]
[[분류:위나라 (춘추 전국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