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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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사천 전투
|전체=[[정유재란]]
|그림=임진왜란사천전투도.jpg‎
|날짜=[[1598년]] [[10월 1일]]
|장소=[[조선]] [[경상도]] [[사천 선진리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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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중로군·동로군을 편성하여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 유키나가|고니시]]군), [[사천 선진리왜성]]([[시마즈 요시히로|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 기요마사|가토]]군)에 대해서 동시에 남진하였고,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돌입했다.
 
이 삼로군 중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인솔하는 중로군 4만 명의 조·명 연합군이 시마즈군이 주둔하는 [[사천시|사천]]으로 남진해 들어갔다. 사천은 일본군의 근원지인 [[부산]]과 일본군 왼쪽 끝의 [[순천왜성]]과 [[남해왜성]]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함락시키면 서쪽으로 있는 일본군과의 연락이 분단될 위험이 있었다.
 
당시 사천일대의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주축으로 한 시마즈 가문의 5개 부대가 다소 느슨한 지휘체계로 결합해 있었다. [[1597년]] 시마즈 요시히로는 [[모리 가쓰노부]]가 축성한 [[사천 선진리왜성]]에 주둔하며 사천에서 진주에 이르는 요해(要害)에 진영을 설치하는 한편, [[진주성]]에 미하라 시게다네(三原重鍾)를 주둔시키고 [[망진왜성]]에는 중로군이 남강을 건너 남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로 하여금 수비를 담당시켰다. 또한, 영춘과 사천에 성을 축조·보수하여 [[영춘왜성]]과 [[사천구성]]<ref>사서에는 사천읍성을 사천구성이라 서술하고 있으며 사천왜성(선진리왜성)을 사천신성으로 서술하고 있다.</ref>에는 [[가와카미 히사토모]](三上久智)와 [[가와카미 다다노리]](川上忠實)로 하여금 각각 수비하게 하여 [[진주시|진주]] [[남강 (경상도)|남강]]을 최전 방위선으로 삼고 또 망진왜성·영춘왜성·사천구성의 3성을 사천 선진리왜성의 전진 방어진지로 삼고 있었다. 시마즈군의 병력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인솔하는 7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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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는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에게 명하여 적의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식량창고가 불타버리자 한층 더 궁지에 빠지고, 단기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왜성의 뒤에 굳세고 튼튼한 진을 치고 복병을 배치했다. 요시히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량의 총을 사용하고 지뢰를 묻는 방법으로 연합군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 또한 쇳조각이나 철정을 포탄 대신에 장전 한 대포도 사용했다. 연합군이 공격하다 지치자 요시히로는 복병을 출동시켜 적의 대열을 끊어 교란, 요시히로 본대도 공세로 전환했다. 연합군은 양식문제로 고민하고있었고, 요시히로군의 공세에 지쳐 철수하고 만다.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