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부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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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플뢰르]]에서 항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살 때, 그는 기선에서 일을 했다. 1835년, 그의 가족은 [[르아브르]]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외젠 부댕의 아버지는 사진술 사업을 하였다. 외젠 부댕도 역시 몇 년후, 그의 작은 가게를 차렸다. 아버지가 항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부댕 역시 항해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의 가게에서, 부댕은 여러 예술가들과 만나게 되었고, [[콩스탕 트루아용]], [[밀레]] 등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그는 [[장 밥티스트 이자베이]]와 [[토마스 쿠튀르]]를 만나 예술적 경험을 키우게 된다. 22살 때, 그는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했고, [[파리]]와 [[플랑드르]] 지방을 여행하였다. 1850년에, 그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많이 [[노르망디]] 지방을 그리려고 다시 돌아갔고, 1855년 부터 [[브르타뉴]] 지방을 정기적으로 여행했다.
1857년에서 1858년 사이, 그의 친구이던 [[모네]]는 그에게 [[캐리커쳐]]를 포기하고 풍경화를 그려달라고 설득했다. 그는 모네에게 밝은 색조, 물의 조절 등을 알려주었다. 1874년에 부댕은 모네와 그의 젊은 친구들을 그의 첫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초대했다.
부댕의 높아져가는 명성은 그를 1870년대 많은 곳을 여행하게 만들었다. 그는 [[벨기에]], [[네덜란드]], 남부 프랑스들을 여행했고, 1892년에서 1895년에는 정기적으로 [[베니스]]를 방문했다. 그는 계속 해서
네덜란드의 17세기 화가들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요한 용킨트]]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밖에서 칠하라고 했다. 그는 파리살롱에서 계속 전시회를 진행했고, 1881년 파리 살롱에서 3번째 메달과 1889년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1892년 부댕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만들었다.
그는 병 때문에 남부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다. 결국 그는 그의 집인 [[도빌]]에서 그가 자주 그리던 [[영국 해협]]을 보면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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