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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문종의 사후 어린 단종을 대신하여 관료들과 외척들이 발호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숙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이 두각을 드러냈으며, [[계유정난]]을 빌미로 반정의 명분을 삼았다.
 
[[조선 단종|단종]]이 즉위하였을 때는 나이 겨우 12세에 불과하여, 부왕이자 선왕인 문종의 유명(遺命)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좌의정 [[남지]](南智)·우의정 [[김종서 (1383년)|김종서]] 등이 그를 보필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또한 협찬(協贊)하여 왔다.
 
[[파일:Joseon-Portrait of Shin Sukju.jpg|thumb|right|140px|[[수양대군]]의 책사 [[신숙주]]]]
 
== 경과 ==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인]] 일파와 [[안평대군]]의 친속들을 제거한 [[조선 세조|수양대군]]은 영의정 겹 섭정에 오르고, [[신숙주]], [[한명회]], [[권람]] 등은 선위의 형식으로 [[조선 단종|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게 한다.
 
=== 계유정난 ===
 
=== 선위 ===
정변으로써 실권을 얻게 된 수양대군은, 바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형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함으로써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정인지]]를 좌의정에, 자신의 맏아들 [[도원군]]의 장인이기도 한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하는 한편,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여 이것을 왕의 이름으로 받았다.
 
수양대군의 위세와 권위로 인하여 사태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달했음을 깨닫고 단종은 [[1455년]](단종 3) 윤 6월 수양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전수(傳授)하니, 단종의 뒤를 이은 그가 곧 세조이다.
[[선위]] 계획은 권남·정인지 등이 극비리에 추진한 것이라 비록 선양의 형식을 택하였다고는 하지만, 계략에 따른 왕위의 강탈이었다. 이러한 처사에,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형조참판 [[박팽년]]·직제학(直提學) [[이개]]·예조참판 [[하위지]]·사예(司藝) [[유성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무인(武人) [[유응부]] 등은 상왕으로서 수강궁(壽康宮)에 있는 단종의 복위와 반역파의 숙청을 꾀하고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사(明使)를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김질 (1422년)|김질]](金礩)·[[정창손]](鄭昌孫) 등은 사태의 불리함을 보고 이를 밀고하였다. 세조는 곧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으므로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形 : 불살라 죽이는 형벌)으로 형살(刑殺)되었으며, 하위지도 참살되고,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하였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에 연루된 자로 [[권자신]](權自愼)·[[김문기]](金文起)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세조는 성삼문 등의 이 밀로에 상왕 단종도 관계하였다 하여 강봉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삼아 군사 50명으로 호송케 하여 영월로 귀양 보내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를 추폐(追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도 순흥(順興)으로 귀양 보냈다.
 
[[파일:Stale of Gumseong Daegun.jpg|thumb|[[금성단]] 안에 있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 [[인조반정]]
 
== 주석각주 ==
<references/>
{{글로벌세계대백과|제목=조선 양반사회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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