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라우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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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연도 =
|대수 = 3
|취임일 = 1943년 10월 14일
|퇴임일 = 1945년 8월 17일
|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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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파일:Jose Laurel.JPG|thumb|220px|left|1922년 변호사 시절의 호세 라우렐]]
[[1891년]] [[3월 9일]] [[바탕가스 주]] 타나우안의 부유한 정치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테로 라우렐이었고, 모친은 호코바 가르시아였다. 그의 아버지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혁명 정부에서 공직을 맡았으며, [[필리핀 헌법|1898년 마롤로스 헌법]]의 서명자였다.
 
10대의 라우렐은 여자 친구와 삼각 관계에 있는 경쟁자를 바탕가스 칼로 거의 죽일 뻔함으로써 살인미수로 기소되었다. 로스쿨에서 학업을 하는 동안 그는 무죄를 주장하며, 결국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ref>[http://www.lawphil.net/judjuris/juri1912/mar1912/gr_l-7037_1912.html G.R. No. L-7037, March 15, 1912]</ref>
 
 
[[1915년]]에 [[필리핀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곳은 이후 미국 연방 대법원장이 되는 조지 A. 말콤이 학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그후 1919년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라우렐은 [[예일 법학대학원]]을 입학하여 그곳에서 법학 법사 학위를 받는다.
 
라우렐은 그의 공직을 신림청 직원으로 학생 때부터 시작한다. 이후 그는 필리핀 법전화의 업무를 하고 있는 법전 위위회의 서기로 일을 한다. 그가 법전 위원회로 일을 할 때, 그는 위원장인 이후 필리핀 대법원장이 되고, 젊은 라우렐에게 멘토가 되어줄 토마스 A. 스트리트를 소개 받았다. <ref>American Colonial Careerist, p. 10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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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본에 협력하며, 필리핀 행정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제국 의회에서 [[도조 히데키]] 총리가 보여준 필리핀 독립의 방침을 받은 독립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헌법을 초안하였고, [[1943년]]에 일본의 영향 하에 있는 국민 의회에 의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동년 [[1943년]] 11월 필리핀 대표로 [[대동아 회의]]에 참석하였다.
 
일본의 패전이 예정되면서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의 조언으로 [[1945년]] 3월말 간신히 필리핀을 탈출하여 대만으로 향한다. 대만에서는 당초 비빔밥에 허술한 식사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 후, 일본 나라 현 나라호텔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후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전범으로 지정되어, 가족과 [[요코하마 감옥]]에 두 달간, 그리고 [[스가모 구치소]]에 열 달 동안 수감되었다. 종전 이틀 후인 [[8월 17일]] [[필리핀 제2공화국]]의 해체를 선언했다.
 
[[1946년]] 7월 귀국하여 친일 협력을 통해 132개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나, [[1948년]] 4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사면을 받는다. [[1951년]]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3년]]에는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옹립에 진력했다. [[1954년]]에는 경제 사절 단장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라우렐-랭리 협정”에 서명했다.
 
[[1957년]]에 공무에서 은퇴하며, 2년 뒤인 [[1959년]] [[11월 6일]]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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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제2공화국]]
 
== 주석각주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