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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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태조]]와 [[신정왕후 (고려)|신정왕태후]] 황보씨<ref>황주의 유력 호족 황보제공의 딸</ref>의 아들 [[고려 대종|대종]](戴宗)의 딸로, [[고려 성종|성종]](成宗)과 [[헌애왕후|천추태후]](千秋太后)의 동생이다. [[969년]] 아버지 대종(戴宗)을 잃고 수년 뒤에는 어머니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까지 여의어 할머니 [[신정왕후 (고려)|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 皇甫氏)의 손에 길러졌다. 이후 언니인 [[헌애왕후]]와 함께 조모의 성을 따서 황보씨라 칭하기도 하였다.
 
호족을 견제하려던 [[고려 광종|광종]]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에 이어 [[고려 경종|경종]]의 왕비가 되었으나, 남편인 [[고려 경종|경종]]과의 사이에서 소생 없이 사망해 과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있는 사저로 나가 살았다.
 
=== 간통과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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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후비열전과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출산 직전 그녀는 이웃에 살던 [[고려 안종|왕욱]]의 사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고려사]]의 편찬시기인 [[조선시대]]의 지배관념이었던 [[유교]]의 영향으로 그녀의 행실에 부정적이었던 [[고려사]] 편찬 사관들이 그녀의 행동을 비판하여 더욱 나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꾸며낸 사실로 추정된다.
 
{{인용문|성종 11년(992년) 7월에 후(后)가 안종(安宗)의 집에서 자는데 가인(家人)이 섶을 뜰에 쌓고 불을 질렀다. 불이 바야흐로 크게 붙으매 백관(百官)이 달려가 구하고 성종(成宗)도 역시 빨리 가서 위문하니 가인(家人)이 드디어 사실을 고(告)하는지라 이에 안종(安宗)을 유배하였다. 후(后)가 부끄러워 울며 곧 집으로 돌아오다가 겨우 문(門)에 이르러 태동(胎動)이 있어 문 앞에 있는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을 낳고(免身)는 죽었다.<ref>고려사 후비 열전</ref>}}
 
대종의 딸 헌정왕후와 안종의 아들 왕순은 모두 [[고려 태조|태조]]의 손녀, 손자이니, 그들은 모자지간이면서 사촌남매간이 되는 셈이다. 향년 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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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추태후 (드라마)|천추태후]]》([[KBS]], [[2009년]]~[[2009년]], 배우: [[신애 (배우)|신애]],[[박은빈]])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