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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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청 사건 적발 ===
[[파일:WatergateFromAir.JPG|thumb|도청 사건이 발생한 워터게이트 빌딩.]]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근무하던 경비원 프랭크 윌즈(Frank Wills)는 건물 최하부 계단의 후미진 곳과 주차장 사이 문 위에 기묘한 테이프(tape)가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는 문의 열쇠가 잠겨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청소부가 작업 도중 테이프를 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누군가 다른 사람이 테이프를 묶어 놓았다는 의심이 들자 워싱턴 시경에 불법 침입이 일어난 사실을 통보했다.
 
경찰은 도착 후 같은 호텔에 있던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본부 사무소에 불법 침입한 5명의 남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5명은 비질리오 곤잘레스(Virgilio González), 버나드 버커(Bernard Barker), 제임스 W. 맥커드(James W. McCord), 유지니오 마르티네스 주니어(Jr. Eugenio Martínez), 프랭크 스터지스(Frank Sturgis)이다. 이후 증거 사진에서 그들은 3주 전 같은 사무소에 침입한 적이 있고, 이번 침입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던 [[도청기]]를 재설치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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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 ===
[[1973년]] [[1월 8일]] 리디와 헌트를 포함한 침입범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으나, 맥커드와 리디 이외의 전원이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에서는 피고전원에 대해 범죄 공동모의, 가택침입 및 도청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내려졌으나, 피고가 증언을 하지 않고 유죄를 인정했으니 보석금을 지불해도 되냐는 사실을 밝혀 왔다. 이에 대해 [[존 J. 시리카]] 연방재판소판사<ref>맥시멈 존이라 알려져 있다.</ref>는 크게 화를 내고, 피고에 대해 30년형을 언도하는 동시에 그룹이 사건조사에 협력적이란 판결을 재고할 것도 이야기했다. 이 판사의 발언에 응하여 맥커드가 스스로 대통령 재선위원회와의 관계가 위증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 침입범에 대해 재판은 가택침입의 재판만 유죄선고로 끝나고, 다른 사건에 대한 조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샘 J. 아빈 Jr.]] 상원의원은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를 설립해 백악관 직원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4월 30일]] 닉슨은 그의 가장 유력한 보좌관 홀더먼 및 아릭만의 사직을 강요했다. 거기에 닉슨 자신에 대한 불리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John Wesley Dean III)을 경질하고, 새로운 법무장관으로 [[엘리엇 L. 리처드슨]](Elliot Lee Richardson)을 임명했다. 그에게는 특별검사를 지명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5월 18일]] 리처드 닉슨은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 Jr.)를 특별검사로 지명했다. TV에 방송된 심문은 전날 미국상원에서 시작했다.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의 공청회는 여름을 통해 방송되었고, 이것은 닉슨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이었다. 특별위원회는 거기에 [[7월 13일]]에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위원회에서 [[알렉산더 P. 베터필드]] 대통령 부보좌관은 백악관이 대통령집무실의 모든 대화를 자동녹음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이것은 닉슨과 존 딘 법률고문의 면담을 녹음한 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콕스 특별검사와 상원조사위원회 양측 모두 테이프제출을 요구하는 소환장을 발부했다.
 
닉슨은 대통령 특권으로 이를 거부하고,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을 통해서 콕스 특별검사에게 소환장 취소를 명령했다. 콕스의 거부로 인해 1973년 [[10월 20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닉슨은 콕스 특별검사 해임을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요구했으나,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자진사임했다. 뒤이어 윌리엄 D 란케르즈하우스 법무차관도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하였다.결국 [[로버트 H. 보크]] 법무차관보가 임시 법무장관대리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1973년 [[11월 17일]] 플로리다 주 올란드에서 닉슨은 400명의 기자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I am not a [[wikt:crook|crook]].)"라는 유명한 말도 이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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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판결을 받기에 충분한 표의 존재를 중요한 공화당 상원의원에 의해 전달받자, 닉슨은 스스로의 의사로 사퇴할 것을 결정했다. 1974년 [[8월 8일]] 밤 국민전체에 대한 TV연설에서 닉슨은 [[8월 9일]] 정오에 사퇴한다는 것을 발표했다(즉, 그때 닉슨은 탄핵을 받게 된 유일한 대통령으로 소개되었으나, 현실에서는 탄핵결의가 나오기 전에 사퇴했기 때문에 닉슨은 현실에서는 탄핵을 받지 않아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
 
닉슨의 사임 후 부대통령인 [[제럴드 R. 포드]](Gerald Rudolph "Jerry" Ford, Jr.)가 대통령으로 승격되어 [[9월 8일]] "닉슨 대통령이 지시한 가능성이 있는 범죄에 대해선 무조건 대통령 특별사면을 재판 이전에 하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으로 인해 닉슨은 이후 모든 조사와 재판을 피할 수 있었으나, 사면을 받았다는 것은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찰스 콜슨은 그 후 에르즈바크 사건에 관한 고발로 유죄가 인정되어 은폐에 대한 고발은 취하되었다. 스트론에 대한 고발은 취하되었다. 3월에 기소된 7명중에서 남은 5명은 [[1974년]] 10월에 공판이 진행되었다. [[1975년]] [[1월 1일]] 파킨슨이외 모두는 유죄를 피했다. [[1976년]] 상소재판소가 마디안때문에 새로운 재판을 명령했다. 또한 그들에 대한 고발은 모두 취하하였다. 홀더먼, 아릭크만 및 미셸은 [[1977년]]에 변명을 끝냈다. 아릭크만은 [[1976년]]에 다른 2명은 1977년에 형무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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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검열]]
 
== 주석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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