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카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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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가 되면 우량카이라는 말은 북서부 지방에 드문드문 흩어져 사는 부족들을 그들이 사모예드계인지 튀르크계인지 몽골계인지 상관하지 않고 퉁쳐서 일컫는 말이 되었다.<ref>C.P.Atwood-Encyclopedia of Mongolia, p.9</ref> 1757년 [[청나라]]는 최북방 국경에 우량카이 [[팔기군|기]]를 설치했다. 몽골인들은 [[투반인]]들을 우량카이라고 불렀다. 또 오늘날의 [[바양을기 주]], [[호브드 주]]에 사라던 부족들을 [[알타이 우량카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오이라트]]와 관련되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또 동부 몽골의 [[다얀 칸]] 밑에도 6개 투먼으로 된 우량카이 부족이 있었다. 이 우량카이는 젤메와 수부타이의 출신 부족이었다고 전해진다. 알타이 우량카이나 홉스굴 우량카이는 튀르크계나 사모에드계가 없었다.
 
명나라 때는 [[여진]]이 중국인들 보기에 만주의 숲속에 사는 "삼림민"들이었고, 그래서 이들도 우량카이와 같은 말인 "올량합"이라고 불렀다.<ref name="Crossley">{{cite journal|title=An Introduction to the Qing Foundation Myth|first=Pamela Kyle|last=Crossley|authorlink=Pamela Kyle Crossley|journal=Late Imperial China|volume=6|number=2|date=December 1985|pages=13–24|doi=10.1353/late.1985.0016}}</ref> 이 말이 한국어에도 전해져서 여진의 일파를 "올량합"이라고 일컫다가<ref>태조실록 1권, 총서 126번째기사 / 올량합과 알타리가 조회와서 다투다가 화해하다. 태조가 집에서 이들을 대접하다.<br />(알타리는 [[누르하치]]의 조상 [[동맹가]]의 부족인 [[오돌리 아이만]]을 말한다)</ref> 이 말이 변해 "오랑캐"가 되었다. 조선에서 일컬은 우량카이는 [[야인여진]] 왈카부를 이름으로, 나중에는 [[건주여진]]도 야인여진을 일컬어 올량합이라고 했다.<ref>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4번째기사 / 용골대가 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br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ref> [[임진왜란]] 때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두만강을 넘어가 우량카이와 교전했다가 패퇴한 바 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