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포병학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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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
6․25전쟁당시 한국군 포병은 북한에 비해 1:8.8로 절대적인 열세였다.<ref>[[포병전사 연구]],지중렬,21세기 군사연구소,2012,22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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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color="#ecec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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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2밀리 자주포||176||11,260미터
|}
전쟁발발시 육군의 포병은 7개 대대로 전방 4개 사단에 각 1개 대대가 예속되어 있었고, 옹진지구의 제17연대에는 제7포병대대가 지원되었으며, 2포병대대는 용산에 위치한 포병학교의 교도대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육군의 포병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개전초기의 옹진지구 전투, 축석령지구 전투, 화천-소양강 북안지역 전투에서 적의 진출을 지연하였으며, 낙동강지구 전투에서는 낙동강전선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전선이 교착된 이후에는 저격능선 전투, 피의 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에서 화력지원을 실시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포병학교에서는 교관들을 비상소집하여 최소한의 인원을 남기고 20여명을 관측장교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의정부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교육생들은 전방 포병부대로 탄약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축석령 지구 전투에서 포병학교 교관들은 악조건에서 관측장교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사하였고, 교도대대장이었던 김풍익 소령은 적 전차가 포진지 10m 전방까지 접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직접조준사격하여 포를 파괴시키고, 적 전차 사격에 의해 전사하였다.<ref>[[포병과 6․25전쟁]],육군본부 군사연구실,육군본부,2006,95~511쪽</ref>
=== 6.25전쟁 이후 포병의 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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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육군 포병 학교]]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