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183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봇 : 분류:조선 고종을(를) 분류:대한제국 고종(으)로 옮김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주석 → 각주)
6번째 줄:
==생애==
=== 생애 초반 ===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재원(載元), 자는 순팔(舜八)이다. [[조선 장조|장조]]의 서2남 [[은신군]](恩信君)의 증손이며,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의 손자이며, [[고종황제]]의 종형이다. 아버지는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이며, 생부는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이다. 본래는 [[조선 인조|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이었으나 할아버지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왕족이 되었다.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셋째 서자로 친왕손이었으나, [[조선 숙종|숙종]]의 서3남 [[연령군]]의 양자 [[낙천군]]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양자가 되면서 다시 연령군의 후손도 된다. 부인은 정경부인 김씨(貞敬夫人 金氏)이다.
 
[[1848년]](헌종 15) [[5월]]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1개월만에 사퇴하였다. [[1850년]] [[12월]]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853년]](철종 4) [[2월]] [[조선 철종|철종]]이 친히 춘당대(春塘臺)에서 주관한 응제 때, 부(賦)에서 1등하였으므로 특별히 직부전시<ref>초시,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바로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ref>의 명을 받았다. 또한 철종은 그가 [[은신군]]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고 겹경사라 하여 [[은신군]] 사판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했다.
 
=== 관료 생활 ===
[[1853년]](철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854년]] 사헌부 지평이 되고, 1855년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이후 [[홍문관]] 응교, [[1857년]] 홍문관 교리, [[성균관]] 사성을 거쳐 빈전 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내고 1863년 3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해 7월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그해 말 행 호군(行護軍)으로 전임되었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중용되어 1864년(고종 1) 1월 동지경연사(同知經延事)로 승진, 1월 12일에는 승진 기념으로 자신의 집안에 내려오던 면세전(세금이 면제된 토지)를 임금에게 바쳤다. 바로 행 [[승정원]][[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8번째 줄:
이후 그해 3월 [[승정원]]도승지·[[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4월]] [[종친부]]유사당상·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이조참판을 거쳐 [[1864년]] 홍문관 부제학 · 동지[[춘추관]]사 ·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하고, 1865년 1월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가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65년 8월 공조판서가 되었다. 9월에는 연생전(延生殿)의 서사관이 되었다. 그 뒤 예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1866년 한성부판윤으로 부임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이조판서·공조판서·[[의정부]][[우찬성]]을 역임하였다. 186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 할 때에는 종정경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그 뒤 외직인 수원부유수로 나갔다가 되돌아와 1871년 이조판서·판의금부사·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다시 한성부판윤으로 나아갔가.
 
[[1874년]] [[11월]] 숙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였으나 이재원은 별다른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1876년 평안도 관찰사, 이어 경기도 관찰사 · 광주부유수 · 강화부유수 등 외직을 전전하였다. 1879년 공조판서가 되고 1880년 예조 판서, 판돈녕부사를 거쳐 1881년 초 다시 강화부유수로 나갔다가 그 해에 통리기무아문의 개편에 따라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에 임명, 교련국(敎鍊局)에 배치되어 신식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882년 이조판서를 거쳐 1884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 생애 후반 ===
28번째 줄:
1891년 3월 효정(孝貞)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1898년]] 고조부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왕의 자손 4대를 승습하는 제도에 의하여, [[1899년]] [[9월 21일]] 군의 작위를 받고 완림군(完林君)으로 추봉되었다.
 
==가족관계==
[[흥완군]]의 아들로 후사 없이 일찍 죽은 [[흥녕군]]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가 흥녕군의 양자가 되면서 후사가 없는 아버지 흥완군은 다시 [[조선]] [[조선 선조|선조]](宣祖)의 아홉째 아들 경창군(慶昌君)의 8대손 이신응의 아들 이을경을 양자로 삼아 [[완순군]]이라 하였다.
 
*조부: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년 - 1836년)
*조모: 군부인 여흥민씨
*아버지(양부):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1809년 - 1828년)
45번째 줄:
 
== 참고 ==
* [[흥완군]]
* [[흥인군]]
* [[흥녕군]]
* [[완순군]]
* [[남연군]]
* [[흥친왕]]
* [[완영군]]
 
== 주석각주 ==
<references/>
 
65번째 줄:
 
[[분류:1831년 태어남]]
[[분류:1891년 죽음]]
[[분류:음서]]
[[분류:과거 급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