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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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Edward of Westminster.jpg
|그림제목 =
|이름 =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작위 = [[웨일스 공]]
|출생일 = {{출생일|145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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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Edward of Westminster, [[1453년]] [[10월 13일]] - [[1471년]] [[5월 4일]])는 [[영국]]의 왕족으로, [[랭커스터 왕가]]의 국왕 [[헨리 6세]]와 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다. 태어난 지 이듬해인 [[1454년]], [[윈저 성]]에서 [[웨일스 공]]에 서임되었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의 탄생과 [[웨일스 공]] 등극은 모계(母系)의 왕위 계승권이 [[랭커스터 왕가]]보다 앞선다는 점을 내세워 그때까지 후사가 없었던 [[헨리 6세]]의 추정 상속인 자격을 인정받았던 [[요크 왕가|요크 가문]]의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에게 중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혔고, 이듬해인 [[1455년]] [[장미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ref>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났을 때, 국왕 부부 사이에 결혼 후 8년간 자녀가 없었으며 갓 태어난 아들에게 아비로서 축복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버킹엄 공의 말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헨리 6세]]의 병세가 깊었던 것을 연유로 에드워드가 국왕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생부 후보로는 왕비 [[앙주의 마거릿]]의 측근이었던 서머싯 공 에드먼드 보퍼트,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 등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으며, [[헨리 6세]] 본인은 드물게 정신이 돌아올 때에도 아들의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았다.</ref> 전황이 불리해지자 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프랑스]]로 망명, [[1470년]]에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딸 [[앤 네빌]]과 혼인하였다. 이후 [[1471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요크 왕가]]의 [[에드워드 4세]]와 맞서 싸웠으나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의 사망으로 [[랭커스터 왕가]]의 적통은 끊겼으며, 왕위 계승 권리는 서자 계열인 보퍼트 가문의 상속녀 [[마거릿 보퍼트]]를 거쳐 후일 [[헨리 7세]]라는 이름으로 [[튜더 왕가]]를 건립하는 헨리 튜더에게로 넘어갔다.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