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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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의 재빠른 준비는 프랑스를 놀라게 하였다. 루이 14세는 9월 초부터 시작되는 가을 폭풍으로 인해 그들이 준비를 마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개입 시기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실제로 10월 첫주가 지나기까지 날씨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의 함대는 발이 묶여 있었다. 그 해에는 가을 폭풍이 일찍 시작되었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교황의 바람"이라 부르며 바람이 지속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10월 말이 되자 폭풍은 끝나고 바람의 방향은 서풍에서 동풍으로 바뀌어 "개신교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함대는 3주나 기다린 끝에 10월 28일 출항하였다. 그러나 다시 바람의 방향이 남서풍으로 바뀌자 11월 9일 귀항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11일 함대는 다시 출항하였고 [[스페인 무적함대]]보다 4배나 많은 배에 6만의 병력과 5만의 말을 태운 네덜란드 군대는 [[잉글랜드]] [[하위크]]에 당도하였다. 바람이 북풍으로 바뀌자 윌리엄의 함대는 남쪽으로 밀려나 11월 13일에는 [[영국 해협]]의 [[도버]]와 [[칼레]]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템즈강]] 어귀에서 네덜란드 해군이 지나가는 것을 두 번이나 지켜보기만 하였는데 첫 번째는 강한 동풍의 영향으로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 1688년 [[율리우스력]] 11월 5일([[그레고리력]] 11월 15일) 윌리엄의 대규모 군대가 [[데번 주]] [[브릭스햄]] 부근의 [[토베이]]에 상륙하게 되었다. 윌리엄은 많은 군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이들 중 일부가 군대에 합류하였다. 그가 상륙한 11월 5일은 [[불꽃놀이 밤]]이자 [[화약음모사건]] 기념일 이었다. 그의 깃발에는 "잉글랜드의 자유와 개신교의 신앙, 나는 지켜낼 것이다"라고 적혀있었다.("나는 지켜낼것이다"는 [[오랜지 왕가]]의 표어였댜.) 윌리엄의 군대는 대략 15,000에서 `8,000명의 보병과 3,000여 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14,352 명의 네덜란드 용병(이 용병들의 출신지는 스코틀랜드, 스칸다나비아, 독일, 스위스 등지로 다양했다.)과 약 5천여 명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자발적 입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병대들의 상당수는 [[위그노]]였으며 경비대에는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에서 건너온 200여명의 흑인도 있었다.
<ref>Robert Beddard, A Kingdom without a King: The Journal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the Revolution of 1688 (Phaidon, 1988), p. 19.</ref>
용병 중의 상당수는 가톨릭 신자였다.<ref>Keith Schuchard, M. (2002), Restoring the Temple of Vision: Cabalistic Freemasonry and Stuart, Brill ISBN 90-04-12489-6, p. 76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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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명예혁명은 [[영국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왕권과 의회의 갈등에 중요한 이정표가 마련된 사건이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제임스 2세의 퇴위와 [[1689년 권리장전]]으로 인해 더 이상 군주의 절대적 권리에 대한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와 영국은 [[전제군주제]]와 결별하게 되었고 [[입헌군주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 주석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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