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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 ~ [[1672년]] [[12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 18현(海東十八賢)의 하나이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때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일찍부터 [[김장생]]과 [[김집 (1574년)|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 (1574년)|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그들을 동정하였고, [[소현세자]] 사후에게는 세자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밖에 났다. 그 뒤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 (1574년)|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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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 출생과 가계 ====
동춘당 송준길은 1606년([[선조]] 39) [[영천]][[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과 광산김씨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정릉의 외가인 김은휘의 집(서울 정동 구 대법원 청사자리)은 일찍이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었으므로 송준길의 출생까지를 합쳐 사람들이 이곳을 삼현대(三賢臺)라 불렀다.<ref name="daedok">[http://ddcc.or.kr/htm/man-059.htm 송준길:대덕문화원]</ref>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후에 자는 명보(明甫)라 하고 호를 동춘당(同春堂)이라 하였다. 같은 충남 출신으로 친척이자 친구인 [[송시열]]은 한 스승인 [[김장생]], [[김집 (1574년)|김집]]에게서 수학한 동문사이이기도 하다.
 
송세영(宋世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송응서(宋應瑞)이다. 송준길은 쌍청당 송유(1389∼1446)의 7대손이었다. 송시열의 조부와 송준길의 조부는 [[광주 이씨]] [[이윤경]]의 딸을 아내로 맞아 동서가 되었다. 그래서 송시열과 송준길은 가계상 13촌이지만 진외가 쪽으로는 6촌 재종간이다. 나이 한살 위인 송준길을 [[송시열]]은 13촌 숙으로가 아니고 재종형으로 늘 춘형이라 불렀다.
 
한성부 정릉동에서 세 살 때 회덕 송촌으로 아버지 따라 내려왔다. 아버지 송이창은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지만, 학자로서 처음에 [[신응시]], [[김계휘]]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다시 [[이이]], [[송익필]], [[서기]]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회덕 송촌으로 이주한 뒤 김장생, 송갑조, 이시직<ref>이시직은 이석형의 6대손으로 조호익, 김장생의 문인이다.</ref> 등과 시주를 즐기는 등 교류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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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인조]] 2년) 증광과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해의 진사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된 뒤에도 학문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인조 8년) [[세자익위사]]세마(洗馬)에 제수된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인 [[정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고, 그 뒤 대군사부로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가르치는 사부의 한사람이 되었다.
 
한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스승 [[김집 (1574년)|김집]]은 [[소현세자]]가 살해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역시 [[소현세자]]가 살해된 것으로 봤다.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는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는데, 그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삼아 후사를 이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민회빈 강씨]]까지 사사되고 석견, 석철 등이 [[제주도]]로 유배되자 [[민회빈 강씨]]가 [[김자점]] 등의 공신세력과 조귀인 등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봤다. 한편 당색으로는 같은 [[서인]]임에도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계속 공격, 탄핵하였다.
 
1649년(인조 25년) [[김장생]]의 아들이자 그의 스승이며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 (1574년)|김집]]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송준길도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이후 부사직·진선(進善)·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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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임명되었고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였으며, [[1649년]]에 [[인조]]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 등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조선이 청나라의 압력을 받자, 그도 사퇴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집의·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년)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 겸 [[성균관]]좨주를 거쳤다. 이후 그는 학문을 가르쳤고, 그의 문하에서 [[민유중]], [[황세정]], [[남구만]] 등을 배출했다. 제자 중 민유중을 눈여겨본 송준길은 그를 사위로 삼는데, [[민유중]]에게는 그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고, 후에 이들 사이에서 [[인현왕후]]가 태어난다. 민유중의 둘째 딸이 왕비로 낙점되면서 국구가 된다.
 
그 뒤 벼슬길에 여러차례 천거되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사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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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고, 그해 [[9월]] [[송시열]]을 변호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원자]]보양관이 되었으나 2차 예송논쟁으로 사퇴하였다. 이후 김집, 송시열, 윤선거 등과 강독하고 토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송준길은 [[윤선거]]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그를 계속 관직에 추천했으나, [[윤선거]]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또 [[윤선거]]와 [[송시열]]의 사이를 화해시키려 여러번 노력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윤선거]]는 죽기 직전까지도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결코 꺾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아들에게 내려진 벼슬까지 거두어줄 것을 간청했다.<ref name="balchik0207">정구선,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207페이지</ref> [[1669년]](현종 10년) [[4월]] [[윤선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윤선거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애석해했다. 또한 [[참찬]] [[송준길]]은 "사우(스승과 동료)간에 윤선거를 엄탄지신(嚴憚之臣)이 될만 하다고 했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정말 국가의 불행입니다."하고 탄식했다.<ref name="balchik0207"/> [[윤선거]] 사후 그에게는 [[이조]][[참의]]가 [[추증]]되었다.<ref name="balchik0207"/> 그에 대한 추증은 당시 [[의정부]][[좌참찬]] 송준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는데, 송준길이 아뢴 바를 보면 "윤선거는 국가에서 예우하던 신하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사우들이 모두 애석해합니다. 윤선거가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소장(梳章)에까지 한번도 직함을 쓰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사후 명정(銘旌)에도 '성균 생원'이라 썼다 하니, 그 예우하는 도리로 [[증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했다.<ref name="balchik0207"/>
 
[[1670년]] 세자의 관례식에 참석한 뒤 낙향하였으며, 이후 회덕 향리에 은거하다가 [[167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어록해 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 등이 있다. 사망 당시 그의 향년 6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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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그의 사후에도 후손들 중에는 [[송명흠]], [[송계간]], [[송문흠]], [[송후연]], [[송사흠]] 등 [[성리학]]자와 문인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충청남도]] [[연기군]]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충청남도]] [[공주시|공주]]에 이장되었으며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졌다가 [[1700년]](숙종 26년) 대덕군 원정리(대전시 서구 원정동)으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묘비는 이곳으로 이장 한 후에 세워진 것으로, 외손자인 판서 [[민진후]]가 비문을 짓고 증손자인 현령 [[송요좌]]가 글씨를 썼다. 1681년(숙종 7년) 대덕군 회덕의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그해 [[12월 17일]]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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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 남양〈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
* 남양〈윤영순절비문(尹榮殉節碑文)〉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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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 송응서(宋應瑞, [[1530년]] - [[1608년]])
* 할머니 : 이씨
* 아버지 : 송이창(宋爾昌, [[1561년]] ∼ [[1627년]])
* 어머니 : 광산김씨 - 김은휘(김장생의 숙부)의 딸
* 부인 : 김씨(金氏)
* 부인 : 진주정씨(晋州鄭氏, [[정경세]]의 딸)
** 아들 : [[송광식]](宋光栻, [[1625년]] ∼ [[1664년]])
*** 손자 : [[송병문]]
*** 손자 : [[송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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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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