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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운동'''(保路運動)은 [[청일전쟁]] 후 열강에 빼앗긴 이권을 되찾기 위해 민간에서 주도하여 철도를 부설하였으나 당시 국가 재정이 어려워 지면서 [[청나라]] 조정은 철도를 국유화하여 이를 담보로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 하자 [[쓰촨]]지역을 중심으로 철도를 지키자는 운동을 전개한것을 말한다.
 
이를 기점으로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중국은 [[1905년]]이래 이권회수운동에 의하여 광산채굴권과 [[철도]]부설권이 외국으로부터 상당부분 회수되었다. 그리고 [[철도]]를 중국인 스스로 건설하기로 하여 [[호북 성]], [[호남 성]], [[광둥 성]], [[쓰촨 성]]의 신상(紳商)들은 회사를 설립하고 주식을 모았다. 그러나 기대하였던 만큼 자금이 모아지지 않아 공사는 순조롭지 못하였다.<ref name="철도국유화">《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517~p519</ref>
 
여기에 각 지역의 신상들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여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웠고 또한 사리사욕을 꾀하고 있어 [[철도]]공사는 자꾸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청나라]] 조정은 [[호남 성]],[[호북 성]]안의 천한,월한선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영국]],[[프랑스]],독일의 은행단과 550만 파운드를 빌리는 [[차관]]협정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미국]]이 가입하여 결국 4국 은행단이 각각 4분의 1씩 내기로 하고, [[1910년]] 5월에 '철도협정'을 체결하였다.<ref name="철도국유화"/>
 
[[1911년]] 5월 청조는 '신정'(新政)의 일환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13명의 각료를 임명했는데, 문제는 13명의 각료 중 [[한족]]출신은 4명뿐이고 나머지 9명은 [[만주족]]이었으며 그 9명 중 6명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인사였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이 새로운 내각이 가장먼저 의결한 사항이 '철도국유화'였다.<ref>[http://pds.joinsmsn.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003/htm_2010032401061140004300-001.JPG 먼나라이웃나라]</ref> 당시 철도건설이 계획했던것보다 늦어지자 [[청나라]] 중앙 조정의 관리들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해서라도 [[철도]]를 하루속히 부설하자.'는 주장을 폈다. 청조는 우정부대신 [[:zh:盛宣怀|성선회]](盛宣懷)의 건의에 의하여 철도[[국유화]]의 상유를 발표하였으며 청나라 관료 [[단방]](端方)을 천한,월한선 철도건설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성선회는 우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영국]],[[프랑스]],[[독일제국|독일]],[[미국]] 4국 은행단과 600만 파운드를 연리 5%, 40년에 상환하기로 하고 4성의 이금과 염세를 담보로 차관하였다.<ref name="철도국유화"/>
 
==== 보로운동 ====
청조의 [[철도]]국유화 정책은 민중들로부터 즉시 불만을 초래했다. 우선 [[내각]]이 의회에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한 사항이었고 정부가 약속한 민주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점과 [[만주족]]이 독점한 내각에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은 중국 [[민족주의]] 정서를 크게 거스르는 결정이었으며 이미 투자한 민간인들의 이권을 박탈하는 조처로 입헌파,혁명파,온건파 할것없이 민중들로부터 커다란 불만을 사게 만들었다.<ref>[http://pds.joinsmsn.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003/htm_2010032401061140004300-001.JPG 먼나라 이웃나라]</ref> 그리고 이어 '철도국유화'가 해당되는 지역에서 민중들은 [[보로운동]]을 일으켰다. 국유화 발표이후 [[호남 성]]에서 제일먼저 일어나 '청조가 주권을 팔아먹는다'고 항의하여 [[장사]](長沙)에서 1만여명이 참가한 각 계의 모임을 소집하고 '국유화 명령을 철회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조세]]에 항거하여 '청조에 대항하자'며 상인의 철시와 학생의 동맹휴학이 일어났다.<ref name="보로운동">《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520~p521</ref>
 
[[자의국]]에서도 호남순무 [[양문정]]에게 명령을 철회하도록 청조에 상주하라고 요구하여 [[양문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청조에 이를 상주하였다. 그런데 [[양문정]]은 중앙으로부터 오히려 질책만 받았다. 이 소식이 전파되자 군중은 더욱 격분하여 [[보로운동]]이 확산되었다. [[호남 성]]에 이어 [[호북 성]]에서도 [[보로운동]]이 일어나 시위의 규모는 더욱 늘어갔다. '의창'(宜昌)에서 [[만현]](萬縣)까지 이미 [[철도]]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청조는 공사를 강제로 중지시켜 공사장의 노동자와 상인들이 모여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청조에서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이를 강경진압하였다.<ref name="보로운동"/>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쓰촨 성]] 혁명당들이 조직한 '보로 동지군'이 각 지역에서 일제히 일어나 성도를 포위하는 형세가 되었다. 청조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즉시 각 성(省)에 연락하여 [[쓰촨 성]]에 진압할 군대를 파병했다.<ref name="쓰촨폭동"/> 그런데 진압군대를 이끌던 [[단방]](端方)이 [[쓰촨 성]]의 자주(資州)에 이르렀을때 그가 이끄는 호북 신군이 그를 살해하고 시위대에 가담했다. 여기에 전임총독 [[잠춘훤]]도 '[[쓰촨 성]]으로 가 [[조이풍]]과 사태를 수습하라'는 중앙의 명령을 받고 무한까지 왔으나 사태가 심각하다는것을 보고 [[쓰촨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결국 [[성도]]는 '보로 동지군'에게 점령당하고 청조가 진압하지 못한 채 [[10월 10일]] [[우창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ref>신승하 (2004년 4월 10일).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상.하)》. 서울: 대명출판사, p523</ref><ref name="쓰촨폭동"/>
 
== 주석각주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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