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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 정치를 '''당쟁'''(黨爭) 또는 '''당파 싸움'''이라고도 부르나, 이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黨議)라고 표현하였다<ref>
{{서적 인용
|저자=신복룡
|제목=한국사 새로 보기
|날짜=2001-12-20
|판=초판 2쇄
|출판사=도서출판 풀빛
|출판위치=서울
|id=ISBN 89-7474-870-3
|쪽=145~151쪽
당쟁의 폐해를 조선의 멸망 원인으로 보던 지적에 대해 [[일본]]의 [[식민사관]]의 영향이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조선 시대에도 당대 지식인들의 당쟁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였다. [[이익 (1681년)|이익]]은 '붕당론'을 통해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으며, 당쟁의 원인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시데하라 아키라 등은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고,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에 당쟁이 가열되었다고 주장하였다<ref>대한 제국 학정 참여관 시데하라 아키라(幣原 坦), 시학관 오다 쇼고(小田省吾) 그리고 호소이 하지메(細井 肇), 하야시 야스스케(林 泰輔)의 주장이다. {{서적 인용 |저자=신복룡
|제목=한국사 새로 보기
|날짜=2001-12-20
|판=초판 2쇄
|출판사=도서출판 풀빛
|출판위치=서울
|id=ISBN 89-7474-870-3
|페이지=145~151쪽}}</ref>. 또한 조선이 [[임진왜란]] 초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한 이유가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들은 붕당이 지배 계층인 양반 사회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정치 집단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프랑스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 하루에만 무려 1천3백 명이 정치적 이유로 희생되었으며, [[파리 코뮌]] 기간, 흔히 “피의 주간”이라 불렸던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7일 동안 2만5천 명이 희생되었다.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1905년]] [[1월 22일]] 당일에는 15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게다가 당쟁이 격심했던 그 시기에 가장 민생이 안정되었음을 볼 때 역설적이게도 당쟁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이 살기 좋았다. 이는 오늘날 역사에 '견제와 균형만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교훈을 일깨워준다. 이와 반대로 분열과 대립이 없는 정치는 독재정치거나 요순임금과 같은 지극히 이상적인 정치밖에 될 수없다는 것이다.
 
== 주석각주 ==
<references />
 
==참고 자료==
{{참고 자료 시작}}
* {{서적 인용
|저자=신복룡
|제목=한국사 새로 보기
|날짜=2001-12-20
|판=초판 2쇄
|출판사=도서출판 풀빛
|출판위치=서울
|id=ISBN 89-7474-870-3
|쪽=145~151쪽
|장=당쟁은 식민지사학의 희생양|인용문=
}}
* {{서적 인용
|저자=이태진,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제목=한국사 특강
|날짜=2006-8-30
|판=초판 28쇄
|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출판위치=서울
|id=ISBN 89-7096-115-1
|쪽=175 ~ 189쪽
|장=붕당정치의 성립과 전개|인용문=
}}
* {{서적 인용
|저자=한영우
|제목=다시찾는 우리 역사
|판=2판 16쇄
|출판사=경세원
|출판위치=서울
|id=ISBN 89-8341-057-4
|쪽=351~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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