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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여양군||[[조선]]전기의 왕족으로 [[효령대군]]의 증손이자 [[조선 명종]]비 [[인순왕후]]와 [[이량 (조선)|이량]] 남매의 친할아버지}}
'''이자겸'''(李資謙, ? ~ [[1127년]] [[1월 19일]]/[[1126년]] [[음력 12월 5일]]<ref name="joongang0901">[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933484 영광 ‘굴비’ 이름 붙여진 사연을 찾아서 …] 중앙일보 2009년 12월 22일</ref>)은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정치인, 섭정이자 시인이었다. 권신(權臣)이자 척신(戚臣)으로, [[고려 예종|예종]]과 [[고려 인종|인종]]의 장인인 동시에 인종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고려 예종|예종]]이 죽자 외손자인 인종을 추대하였으며, 왕위를 찬탈하려던 왕실의 친인척을 숙청하였다. 외손자인 인종이 즉위하자 자신의 두 딸이자 이모가 되는 [[폐비 이씨 (이자겸의 3녀)|폐비 이씨]], [[폐비 이씨 (이자겸의 4녀)|폐비 이씨]] 자매를 외손자인 인종에게 시집보내 권력을 누렸으나 뒤에 인종을 독살하려다가 도리어 인종에 의해 제거되었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 반대파 인사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인종이 회유한 그의 사돈 [[척준경]]<ref>역시 이자겸의 난에 동조하였다. 그도 이자겸이 제거된 뒤 정에에서 추방당한다.</ref> 등에 의해 제거되었다. [[인천 이씨|경원 이씨]]를 당대 최고의 문벌 귀족 가문으로 끌어올린 [[이자연 (고려)|이자연]](李子淵)의 손자이다.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에 유배되어 말린 생선을 먹고 그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 [[영광굴비]]의 어원이 되었다. 작위는 [[1122년]] 음력 10월에 한양공(漢陽公)으로 책봉되었다가 [[1124년]] 음력 7월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진봉되었다. 본관은 [[인천 이씨|경원]](慶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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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서와 관직 임용 초기 ====
이자겸은 명문가에 태어난 덕분에 [[음서 제도|음서]]로 벼슬길에 올랐고, 바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이호는 자신의 딸을 [[문종]]의 맏아들 [[순종]]에게 시집보내 외척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ref name="pare1996244"/> 왕비의 오빠라는 이유로 그는 [[과거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그에게<ref name="pare1996244"/> 요직이 맡겨졌다. 그러나 순종이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죽는 바람에 그다지 큰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려 순종|순종]]의 왕비로 입궁한 [[장경궁주]]가 순종 사후에 노비와 간통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이자겸도 역시 관직에서 쫓겨나는 등 순탄치 않은 시기를 보내게 된다.<ref name="pare1996244"/> [[고려 헌종|헌종]] 재위 기간에 이자겸의 사촌인 [[이자의]](李資義)가 계림공(鷄林公)으로 불리던 [[고려 숙종|숙종]]과 대립하다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파직된 후 이자겸은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자신의 둘째 딸(훗날의 [[순덕왕후]])을 [[예종]]에게 시집보내면서 다시금 출세가도를 달린다.<ref name="pare1996244"/> [[1107년]] 둘째 딸이 예종의 후궁으로 입궐하였다. 이는 당시 [[여진]]족 정벌에 따른 문신들의 반발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예종]]은 이자겸의 딸과 혼인하였다.<ref name="dangtack135">김당택,《우리 한국사: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푸른역사, 2006) 135페이지</ref> 이자겸은 [[최사추]]의 사위였으며, 김인존(金仁存)의 처남이었다.<ref name="dangtack135"/> [[최사추]]는 당시의 여론을 주도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ref name="dangtack136"/> 김인존은 [[김상기]](金上琪)의 아들인데, 그들은 모두 [[예종]]대 [[여진]]정벌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예종이 이자겸의 딸과 혼인한 것은 [[여진]]정벌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함이었다.<ref name="dangtack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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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집권기간 중 그는 외손자인 태자 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예종대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예종]]은 철저하게 중립정치를 구현하며 외척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ref name="pare1996245">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5페이지</ref> 이자겸은 당시 관료들을 이끌고 있던 [[한안인]] 등과 보이지 않는 권력다툼을 벌이며 자신의 외손자인 태자 구가 왕위에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ref name="pare1996245"/>
 
[[예종]]의 죽음 당시 조신들은 나이어린 태자보다는 왕의 아우들 가운데 한 명에게 선위하는 것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ref name="pare1996243">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3페이지</ref> 하지만 [[예종]]은 자신의 맏아들 구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왕의 아우들을 지지하는 세력과 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논쟁을 벌이며 파당을 이루었다. 왕의 아우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은 [[한언인]]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중앙관료들로서 안정을 희구하는 사람들이었고, 태자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형성된 외척 및 그 주변 사람들이었다.<ref name="pare1996243"/>
 
이들 두 세력이 치열한 왕위계승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한 예종은 이자겸의 힘을 믿고 14세의 어린 태자 구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ref name="pare1996243"/> [[예종]]은 이자겸을 불러 수시로 어린 태자를 지켜달라고 부탁하였고 이자겸은 성심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자겸에게는 세력이 없었지만 할아버지 [[이자연]]이 꾸준히 투자했던 [[불교]] 승려 세력이 있었다. 불교 세력 역시 [[유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그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인다.
 
[[예종]]이 자신의 아들을 부탁할 정도로 이자겸을 신임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장인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ref name="pare1996243"/> 오히려 [[예종]]이 믿었던 것은 경원(지금의 인천) 이씨 집안이었다.<ref name="pare1996243"/>
 
=== 정치 활동 ===
==== 인종의 즉위와 섭정 ====
[[1122년]] 예종의 병이 위중해지자 하늘에 쾌유를 빌었으며, 명산대찰을 방문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예종]]이 [[종양]]으로 병석에 눕게 되어 한달만에 죽게 된다.<ref name="pare1996245"/> 그는 민첩하게 궁궐을 장악하고 외손 [[인종]]을 옹립한다. 예종이 승하한 후 왕위를 노리는 예종의 아우들을 저지하고 유조(遺詔 : 임금이 세상을 떠나며 내리는 조서)에 따라 인종을 등극시키는 데 공헌했다.
 
어린 인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이자겸은 절대권력을 차지하게 된다.<ref name="pare1996245"/> 이자겸의 힘에 의지하여 왕위에 오른 [[인종]]은 정사를 모두 그에게 내맡기다시피 했으며, 이자겸은 그 기회를 놓지치 않고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정적 제거작업에 착수했다.<ref name="pare1996245"/> 한편 [[한안인]](韓安仁)과 [[문공인]](초명 문공미) 등은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보]](帶方公 甫)를 내세워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였다.<ref name="dangtack136"/> [[한안인]]은 [[예종]]에 의해 중용된 인물로서 이자겸과 정치적으로 동일한 노선을 걸었으나, 그가 [[인종]]을 옹립하자 반발했던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한안인]]은 죽음을 당했으며 대방공 보와 문공인 등 60여 인은 유배되었다.<ref name="dangtack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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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년]] [[12월]] 막강한 세력을 가진 [[고려 인종|인종]]의 작은아버지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와 한안인·문공인(文公仁) 등이 역모를 꾀하였다는 명목을 내세워, 대방공 왕보의 가족과 측근들을 숙청, 제거하고 그 일당 50여명을 살해 또는 유배보냈다.
 
이자겸의 정적은 크게 두 부류였다. 첫째는 [[예종]]의 아우 왕보로 대표되는 종실 세력이었고, 둘째는 [[한안인]]으로 대표되는 지방 출신 관료 세력이었다.<ref name="pare1996245"/> 이자겸은 신진 관료를 대표하는 인물인 [[한안인]](韓安仁)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한안인은 이자겸이 조회에 잘 나오지 않고 주요 국사를 집에서 처리한다고 비판하고, 인종에게 아뢰어 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 임명케 하려고 했다. 또한 이자겸이 [[최유적]](崔惟迪)을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하자 [[장응추]](張應樞)가 이를 비밀리에 소문을 낸다. 후에 [[한안인]]은 장응추의 말만 듣고 최유적이 이자겸에게 노비를 뇌물로 바쳐 관직을 얻었다고 비난하였다.
 
[[왕보]]를 비롯한 예종의 아우들은 덕종, 선종, 숙종의 선례에 따라 어린 태자 대신 자신들 중의 한 명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안인]] 세력 역시 외척 이자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염려하여 종실세력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ref name="pare1996245"/> 이들은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못마땅한 태도로 일관하며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본 이자겸은 왕보와 한안인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는 길을 모색한다.<ref name="pare1996245"/>
 
사건의 발단은 한안인이 이자겸의 독단적인 처사를 비방하면서 시작된다. 한안인은 이자겸이 나라의 최고 재상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모두 제집에서 처결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며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비방했다. 또 이자겸이 최유적을 급사중으로 임명하자, 한안인은 내급사중으로 있던 장흥추에게서 최유적이 이자겸에게 노비 20명을 뇌물로 주고 급사중 벼슬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사실인 것처럼 공석에서 발표해버렸다.<ref name="pare1996245"/> 그러나 이자겸이 시비를 가리길 청하자 부끄러워하면서 한동안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한안인이 칩거하자 한때 그와 함께 [[예종]]의 총애를 받던 [[문공미]]와 그의 사촌 아우 [[정극영]], 매부 지어사대사사 [[이영]] 등이 자주 한안인을 방문하였다.<ref name="pare1996245"/> 이를 지켜본 [[최홍재]]라는 인물이 이자겸을 찾아가 [[한안인]]과 [[문공미]]가 붕당을 맺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한다.<ref name="pare1996246">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6페이지</ref> [[최홍재]]는 [[예종]]시절부터 [[한안인]], [[문공미]] 두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이자겸의 힘을 이용하여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ref name="pare1996246"/> 일부 왕제들은 인종이 어린 점을 이용해 정변을 기도하려 했고 마침 정적을 제거하고 정국을 장악하려던 이자겸에게 호재가 되었다.
 
때마침 지난날의 일로 한안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태의(太醫) [[최사전]](崔思全)이 한안인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것을 두고 한안인이 음모를 꾸민다고 이자겸에게 모함하였는데, 한안인이 [[인종]]의 즉위를 못마땅히 여기던 점과 왕제들의 즉위에 동조했던 점을 눈여겨 본 이자겸은 이를 빌미삼아 대방공(帶方公) [[왕보 (대방공)|왕보]](王俌)를 추대하려는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한안인을 제거한다.
 
이어 [[한안인]]은 [[승주군]] [[감물도]]로 귀양보내졌다가 도중에 이자겸의 심복들에 의해 순천 앞바다에 던져져 죽었으며, 대방공 왕보도 귀양길에 올랐다.<ref name="pare1996246"/> 그리고 [[문공미]], [[이영]], [[정극영]] 등 [[한안인]]과 자주 만났던 인물들과 [[한안인]]의 형 [[한안중]], 동생 한영륜, 종제 한충, 처제 임존, 사위 이정 등 연루자 50여 명이 유배되었고, 이들과 친분이 있는 수백 명의 관료들이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ref name="pare1996246"/> 또한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귀양 보내거나 벼슬에서 파면, 해임 등으로 내쫓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 금나라와의 사대 관계 ====
[[1115년]] 건국한 후 날로 강성해지고 있던 [[금나라]]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에서는 [[1126년]] 음력 3월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는 일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금나라에서는 이미 [[1117년]] 사신을 보내 금나라 황제가 고려 왕의 형이라 자처한 적이 있었고, 고려에서도 금나라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사대외교는 하지 않았으며, [[천리장성]]의 성벽을 석 자 더 쌓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의 대신들은 금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는 것은 물론, 국교를 맺는 것 조차 극렬히 반대했으며 심지어 그 사신을 죽이자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금나라가 강성하므로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에는 이자겸 등이 대궐을 불태우고 반대파를 숙청하였기 때문에 이자겸의 말에 반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음력 4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금나라]]가 반드시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고 예상, [[개경]]과 [[서경]] 주변의 성곽 보수와 병력 양성 등을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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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의 자식들까지도 경쟁적으로 큰 집을 신축하여 [[개경]] 거리에 그들의 집이 나란히 인접하게 되었다.<ref name="dangtack136"/> 그러나 껄끄러울 것이 없어진 그의 자제들은 부패 행위를 일삼아 문제가 되었다.
 
이자겸의 아들들과 친척들도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등 횡포를 부렸으며, 특히 출가한 막내아들인 승려 의장(義莊)은 [[교종]](敎宗) 법계(法階) 중 다섯 번째 자리인 수좌(首座)에 임명되어 종교계에도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한편 다른 가문에서 왕비가 배출될 경우 외척 세력이 자신에게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하여 [[1124년]]에는 셋째 딸을, 이듬해에 넷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 왕비로 삼게 했는데,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조조]]가 [[후한]] [[후한 헌제|헌제]]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에 빗대기도 했다<ref> 《[[동사강목]]》 8권 [[1125년]]부분에 최씨(崔氏)의 글로 기록되어 있다. </ref>.
 
[[고려사]]는 당시 그들이 이 같은 재산 축적을 '그 세력이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며 사방에서 음식 선물 등이 들어와 항상 수만 근의 고기가 썩어났다.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자기 집 종들을 앞세워 남의 수레를 약탈해다가 자신의 물자를 수송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수레를 때려부수고 우마를 끌고 다니는 바람에 모든 길이 소요스러웠다'고 표현하고 있다.<ref name="dangtack136"/> [[어사대]] 등의 언관들은 이자겸의 월권행위를 비판했고 [[인종]]은 이자겸의 제거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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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의 이자겸 제거 시도 ====
{{참고|이자겸의 난}}
1124년 음력 1월 모친상을 당해 표면적으로는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실제로는 [[최홍재 (고려)|최홍재]]가 자신을 해칠 것을 우려하여 [[욕지도]]로 귀양보내는 등 여전히 권세를 부렸다. 그해 음력 5월에는 조서에 이름을 쓰지 않고 경으로 부르지 않게 하는 특혜를 받았으며, 이자겸의 집은 [[의친궁]] [[숭덕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이자겸을 따르던 [[박승중 (고려)|박승중]]은 조정에서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로 부르자고 하였는데, 생일에 절을 붙이는 것은 원래 국왕과 태자에게만 한정된 것이었으므로 [[김부식]]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그러나 [[박승중 (고려)|박승중]]은 사사로이 인수절이라 불렀는데, 나중에는 이자겸 본인도 자신의 생일을 두고 인수절이라 칭했으며, 태자와 같은 예우를 받았다.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켜 가던 이자겸은 사사로이 [[송나라]]에 숭덕부 관원을 사신으로 보내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事 : 국사를 처리하는 직책)로 칭했으며, 인종에게도 지군국사로 책봉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자겸은 스스로 지군국사가 되고 싶어 왕에게 자기 집으로 와서 책서를 수여해줄 것을 요청했고, 임명식 날짜까지 강압적으로 지정하였다.<ref name="pare1996247">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7페이지</ref> 임명 시기와 장소까지 스스로 정하여 강압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지군국사는 한마디로 왕의 권한을 가지고 자기가 섭정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요구는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인종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갔다.<ref name="pare1996247"/> 더구나 이자겸이 직접 자신의 집에 와서 직책에 임명해줄 것을 강요한 것을 두고 왕의 인사권을 침해했다고 생각한 [[인종]]은 분노했다. 끝내 이자겸의 소망대로 되지는 못했으나, 이 일 때문에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
 
[[인종]]에게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청한 사람은 내시 [[김찬]]과 [[안보린]]이었다.<ref name="pare1996247"/> 그들은 인종에게 누차에 걸쳐 이자겸을 제거해야 한다고 간청하여 동의를 얻은 뒤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을 포섭하여 왕명이라며 이자겸을 체포할 것을 부탁한다.<ref name="pare1996247"/>
 
[[1126년]] 음력 2월, 인종의 측근인 [[내시지후]](內侍祗侯) [[김찬 (고려)|김찬]](金粲)과 내시녹사(內侍綠事) [[안보린]](安甫麟)이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에게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고 [[고려 인종|인종]]에게 이를 상주하자 인종은 동의한다. 그러자 [[지녹연]](智祿延)은 바로 [[상장군]](上將軍) [[오탁]](吳卓)과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 장군(將軍) [[고석]](高碩) 등을 은밀히 불러 이자겸을 체포하도록 계획을 세운다.
 
이들 무장들은 병권을 쥐고 있던 [[척준경]]과 그의 동생 [[척준신]]을 매우 싫어했던 사람들이었다.<ref name="pare1996247"/> [[척준경]]은 예종대에 여진 정벌전쟁에서 [[윤관]]을 도와 많은 공을 세운 인물로 이자겸과는 사돈지간이었다.<ref name="pare1996247"/> 그런데 이자겸이 권력을 독식하면서 척준경 역시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은 오탁, 권수의 부하 장수로 있다가 형의 배경에 힘입어 그들의 상관인 [[병부]][[상서]]에 올라 있었다.<ref name="pare1996247"/> 따라서 이를 못마땅해 하고 있던 무장들은 [[척준경]]과 준신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그때 마침 [[지녹연]]이 이자겸을 체포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ref name="pare1996247"/> 뜻밖의 상황에 놀란 이자겸은 대신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모으고 대책을 논의했으나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자겸의 난]]은 이자겸이 먼저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고려 인종|인종]]과 그의 측근 관리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이자겸 제거를 기도했던 것이다.<ref name="dangtack137">김당택,《우리 한국사:정치사중심의 새로운 한국통사》(푸른역사, 2006) 137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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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자겸 제거 작업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인종]]은 [[내시]] [[김찬]]을 원로 [[김인존]]과 [[평장사]] [[이공수|이수]]에게 보내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도록 한다.<ref name="pare1996247"/> 김인존과 이수는 [[인종]]의 이자겸 체포 계획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현실적으로는 힘의 약세로 오히려 그들 세력에게 당할 것이라고 충고했다.<ref name="pare19962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이자겸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ref name="pare1996247"/>
 
[[1126년]] [[2월 25일]] 어둠이 내릴 무렵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과 오탁, 그리고 권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한다. [[지녹연]], [[상장군]]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은 더불어 거사하여 대궐을 장악하여 척준경의 아우인 [[병부]]상서(兵部尙書) [[척준신]](拓俊臣)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內侍) [[척순]](拓純)을 죽이고 시체를 궐 밖에 버렸다.
이와 함께, 지후 김정분, 녹사 전기상, 최영 등도 함께 제거하였다. 그러나 내직기두 학문이 성벽을 타고 넘어가 [[중랑장]] [[지호]]를 통하여 이자겸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였다.<ref name="pare199624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8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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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권, 척준경과의 갈등 ====
마침내 [[척준경]]이 밤에 대궐을 불태웠기 때문에 인종은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인종을 따라 나온 거사 측 인물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자겸은 거사에 가담한 자들의 집을 불태우고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 이 일로 인해 궁궐의 대부분이 불타고 많은 군사가 죽었으며, [[과거 제도|과거]] 시행을 철회할 정도로 여파가 컸다.
 
집권한 이자겸은 문하시중을 대신하여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자겸은 죽임을 당한 자파 인물들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척준경 등 수하들의 벼슬을 높이는 한편 인종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오게 한 다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자신이 국사를 처리하였다. 더욱 기고만장해진 이자겸은 문무 백관이 인종에게 절을 올리는 것을 같이 받기도 했으며, 도참설 중 하나인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 십팔자(十八子) 성씨, 곧 이(李)씨가 나라를 얻음)을 믿고 인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둘째 왕비가 된 넷째 딸이 몰래 인종을 돕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자겸은 왕과 같은 권한으로 행동하면서,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 [[중흥택]] 서원에 연금해버리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주관하며 결제했다.<ref name="pare1996250">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50페이지</ref> 그러나 인종은 다시금 이자겸을 축출하기 위해 내의원 [[최사전]]과 모의하고 [[척준경]]과 이자겸을 이간질시키기로 작정한다.<ref name="pare1996250"/> 그런데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은 [[척준경]]이 궁성에 활을 쏘고 불을 지른 사실을 비난하였다. 그러한 때에 국왕은 척준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자겸을 제거하여 공을 세울 것을 종용했다.<ref name="dangtack137"/>
 
또한 그때 마침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집사가 척준경의 집사와 시비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ref name="pare1996250"/> 어떤 일로 싸움을 벌인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상전을 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ref name="pare1996250"/> 이지언의 집사가 홧김에 '너희 상전은 임금이 있는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질렀으니 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고, 너도 마땅히 관노로 글려가야 될 터인데 감히 네놈이 나를 욕해!<ref name="pare1996250"/>" 이 말이 곧 [[척준경]]의 귀에 들어갔고 척준경은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가서 따지며 의관을 벗어던져 버렸다.<ref name="pare1996250"/> 척준경측의 불만이 심해지고 이자겸 측에서는 사과를 거부하자 [[인종]]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갈등을 부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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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 독살 미수 ====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군사력으로 뒷받침하는 [[척준경]]을 회유했는데, 때마침 이자겸의 셋째 아들인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을 욕하는 바람에 화가 난 척준경은 이자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도참설에서 유래된 파자점(破字占)을 믿고 있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십팔자가 왕이 된다'고 하였다.<ref name="pare1996251">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51페이지</ref> 그런데 자신의 성씨인 이(李)자를 분해하면 십팔자가 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ref name="pare1996251"/> 그래서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독이 든 떡을 왕에게 올렸다. 하지만 떡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의 넷째 딸인 왕비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은밀히 떡 속에 독이 들어 있음을 왕에게 알렸고, 인종은 그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까마귀]]에게 떡을 던져 주었다. 그랬더니 떡을 먹은 까마귀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ref name="pare1996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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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과 죽음 ===
결국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바치고, [[1126년]] 음력 5월 [[김향]](金珦)·이공수와 더불어 대궐로 들어가 이자겸의 군사들을 제압한 다음 이자겸을 불러냈다.
 
그러나 도성에 [[척준경]]이 도착한 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정사를 보고 있었다.그 사이에 [[척준경]]은 [[인종]]을 안전한 군기감에 데려다 놓고 수하들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한 다음 승선 강후현을 파견하여 이자겸을 잡아오도록 하였다.<ref name="pare1996252">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52페이지</ref> 대세가 기울었음을 안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인종 앞에 나왔으며, 곧 [[영광군 (전라남도)|영광]]으로 유배되었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는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병력 1백여 명을 이끌고 광화문에 도착했으나 문이 굳게 닫혀 들어가지 못했다.<ref name="pare1996252"/> 그래서 이자덕, 김인규 등과 함께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병부로 갔다. 그때까지도 이자겸이 체포된 줄을 모르고 있었다.<ref name="pare1996252"/> 그러나 그날 저녁 모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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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직 역임 ==
이자겸이 거친 벼슬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ref> 참고문헌에 기록된 관직명 중 가장 자세히 기록된 것을 실었다. </ref>.
 
{|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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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3년]] || 음력 8월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에 임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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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4년]] || 음력 7월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칭호를 더하고,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亮節翼命功臣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에 임명되었으며, 조선국공으로 책봉됨. 이후 인종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여 지군국사로 책봉받으려 했으나 실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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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4년]] ||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 법성포로 유배됨. 그해 12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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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궁주]](長慶宮主) 이씨 : 이자겸의 여동생. 순종에게 시집갔으나 순종이 승하한 후 궁노와 간통하여 궐에서 쫓겨났다.
* [[순덕왕후]](문경왕태후)(文敬太后) 이씨 : 이자겸의 둘째 딸. 예종의 왕비.
* [[폐비 이씨 (이자겸의 3녀)|폐비 이씨]](廢妃 李氏) : 이자겸의 셋째 딸로 인종의 왕비이다.
* [[폐비 이씨 (이자겸의 4녀)|폐비 이씨]](廢妃 李氏) : 이자겸의 넷째 딸로 인종의 왕비이다. 넷째 딸은 이자겸이 인종을 독살하려 했을 때 그것을 저지하기도 했다. 둘 모두 이자겸이 몰락한 후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나 인종이나 의종, 명종 등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 [[고려 순종|순종]] : 매부
* [[고려 예종|예종]], [[고려 인종|인종]] :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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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ref> [http://www.minchu.or.kr/MAN/index.jsp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내용을 참고함. </ref>
 
== 주석각주 ==
<referen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