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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이씨, 서경덕, 최웅선
|자녀= 아들 윤준선, 아들 [[윤호선]], 아들 [[윤달선]]
|부모= 아버지 [[윤영렬]], 어머니 청주 한씨 한진숙
|친척= 윤도운(윤대경) (손녀), [[윤취동]](조부), [[윤웅렬]](백부), [[윤치소]](형), [[윤치오]](형), [[윤치병]](동생), [[윤치영]](동생), [[윤보선]](조카), [[윤원선]](조카), [[윤치호]](사촌 형), [[윤치왕]](사촌 동생)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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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성'''(尹致晟, [[1875년]] [[음력]] [[3월 2일]] - [[1936년]] [[양력]] [[8월 11일]])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군인, 관료, 독립운동가이다. [[중추부]]지사 [[윤취동]]의 손자이며, 토포사 [[윤영렬]]의 셋째 아들로 [[윤치호]]의 사촌동생이며, [[윤치소]]의 동생이자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숙부이다.
어려서 [[성리학]]자 서정순의 문하와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웠다. [[1894년]](고종 30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 의숙]]([[게이오기주쿠 대학교]]의 전신)을 졸업 후 [[대한제국]]의 육군 참위로 신식 병사를 양성하다 다시 [[일본]]으로 유학,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5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귀국 후 [[1904년]] [[대한제국]]의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복무, [[러일 전쟁]]에 참전하고 [[을사 조약]]의 반대에 가담했으며 [[육군]] [[기병]] [[중장]]에 이르러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예편, 공직을 사퇴하고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황성광업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고 분원자기 취체역과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에 관여하며 퇴역 군인 출신 미취직 인사들의 취직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한때 [[1916년]] [[노백린]] 등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 단체 [[대한광복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 다른 이름은 '''치성'''(致晠)이고, [[호 (이름)|아호]]는 악연(岳淵)이다. 야우 서정순(野愚 徐政淳), 간재 [[전우]](艮齎 田愚)의 문인이다. [[충청남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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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윤치성은 [[1875년]] [[음력]] [[3월 2일]]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에서 안성군수와 토포사 등을 지낸 [[윤영렬]]과 [[청주 한씨]] [[한진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치오]], [[대한민국]]의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는 그의 형이었고, [[대한민국 내무부|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은 그의 동생이었다.<ref>이복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ref> 후에 성인이 된 뒤 [[한성부]] 청진동(淸進洞)으로 분가하여 그곳으로 본적을 옮겼다.
윤치성의 9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조선 선조|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다. 8대조 [[윤흔]]은 [[조선 선조|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신]]으로 사후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7대조 [[윤취지]]는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6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5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고조부 윤발(尹潑, 1728~1798) 때에 가계가 몰락하여 윤발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다.
증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이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그러나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그의 할아버지였던 [[윤취동]]의 대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다시 관직에 올랐고, 그 뒤 그의 큰아버지 [[윤웅렬]]이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아버지 [[윤영렬]]이 군관으로 중앙 관직에 진출하여 가계를 일으켰다. 그는 비교적 풍족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윤치성은 성인이 된 뒤에 호를 악연(岳淵)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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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오 의숙]] 졸업 후 그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1896년]](고종 33년) [[10월]] 성성학교(成城學校)에 입학하였다. [[1898년]] [[11월]] 성성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졸업, [[1898년]] [[12월]] 무관생도로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였다. 동기로는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던 [[노백린]] , [[김관현]] , [[어담]] 등이 있었다.
[[1900년]](광무 3년) [[10월]] 당시 [[대한제국]] 국군 원수부(元帥府) 회계국총장(會計局總長) [[민영환]](閔泳煥)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고 [[노백린]](盧伯麟), 김형섭(金亨燮), [[어담]](魚潭) 등과 함께 [[대한제국]] [[육군]] [[참위]]에 특별 임관, 바로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에 임명되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그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여 [[대한제국]] 국비장학생에 선정되었으며, 1903년 4월 일본 기병 제8연대를 견학하였다.
[[1903년]] [[11월 30일]]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5기로 졸업했다. [[1903년]] [[12월]] [[일본]]군 육군 기병 제1연대 견습사관(見習士官)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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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러일 전쟁}}
[[1903년]] [[12월]] 졸업과 동시에 견습사관을 거쳐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나 [[1904년]]초 예편하고 배편으로 귀국하였다.<ref>그의 동기들 중 절반 이상은 후일 [[일본]]에서 벌어진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 투옥되었으나 그는 사건 발생 전에 귀국하였으므로 가담, 연루되지 않아 화를 모면하였다.</ref> 귀국 후 [[1904년]] [[2월 12일]] [[대한제국]] [[육군]] 기병 [[소위]]로 특별 임관, 대한제국 기병대 8연대로 배속되었다가, 바로 다시 [[한국무관학교]] 보병 교관으로 신식 병사의 양성과 훈련을 맡아보던 중, [[1904년]] [[러일 전쟁]] [[뤼순 전투]]에 참전하였다.
[[1904년]] [[9월]] [[청일전쟁]]에 참군하기 위해 [[일본군]] 기병 제8연대에 편입, 훈련을 수료하고 그해 [[10월]] [[오사카]](大阪)을 출발하여 [[청나라]] [[만주]]의 유수(柳樹)에 상륙, 유수지 전투에 참전하였다. [[1905년]] [[1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칙령으로 귀국을 명받고, 전쟁 중 출발 [[1월]]말 [[오사카]]로 갔다가 [[도쿄]]를 경유하여 [[2월]] [[경성]]으로 귀환하였다. [[1905년]] 귀국 길에 6품(6品) 승훈랑(承訓郞)에 서임되었다.
귀환 직후 [[1905년]](광무 8년) [[2월]] 시위기병대(待衛騎兵隊) 소속 교관이 되었다가 [[3월]] 육군 참위(陸軍參尉)로 주[[일본]] 특파 대사(日本特派大使) [[의양군]]의 수행원으로 [[도쿄]]에 다녀왔다. 일본 체류 중 참위(參尉) 3계급 특진, 곧바로 참령(參領)에 임명되었으나 군 기강이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고사하였다. 동 [[3월]] 말, 바로 육군 기병 부위(騎兵副尉)로 임명되었다. [[4월]]에 귀국, 육군 [[기병]][[정위]](騎兵正尉)로 승진하고, [[10월]] 군무부 군무국 기병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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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이 알려지자 일본 [[한국통감부|통감부]]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그는 경무총장 겸 조선주둔 일본군 헌병사령관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本次郞)에 의해 3개월간 감금, 고문당했다. 통감부에 감금당한 그에게 아카시는 고종의 밀명을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윤치성은 모른다로 일관하였다. [[10월]] 군부 군무국(軍務局) 예문과장(藝門課長)이 되었다. [[1908년]](융희 2년) [[노백린]] 등과 함께 혁신피혁점(革新皮革店)을 개업하였다.<ref>동아일보 1926년 1월 24일자 2면, 사회면</ref> [[1909년]] 기병 부장(騎兵副將)으로 있다가 기병 중장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경성조선인 상업회의소 특별위원을 거쳐 [[경술국치]] 이후 군직에서 사퇴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10년]](융희 4년) [[8월 27일]] [[정3품]]에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했다.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남작]]의 작위를 내렸지만 거절, 바로 자신의 퇴직금을 출자하여 형 [[윤치소]], [[신규식]], [[민영휘]],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 신창휴 등과 함께 [[황성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이후 윤치성은 대한제국 군대에서 퇴역한 퇴역군인들의 취직을 주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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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Порт Артур. Углубленный западный бассейн.jpg|140px|left|thumb|[[러일 전쟁]] 당시 [[여순]]항의 모습]]
{{참고|한일합방|광복단}}
[[1910년]] 이후에는 실업계로 진출하여 분원자기 취체역과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 특별위원 등을 지냈다. 분원자기 취체역으로 있을 때 퇴역 군인 출신 인사들을 취직시켰고,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에 관여하며 퇴역 군인 출신 미취직 인사들의 취업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1916년]] [[노백린]],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항일단체 [[대한광복단]]에 가입했으나, [[1919년]] [[광복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이후 타협하여 소극적으로 활동하였다.<ref>1920년대에는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ref>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혔으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점과 [[러일전쟁]]과 [[뤼순전투]]에 참여한 공적이 감안되어 구속, 수감을 면하였다.
[[1923년]] [[4월]]부터 [[5월]]에는 회사인 아성사(我聲社)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충청도]]지점을 개설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6년]] [[2월]] [[경성부]]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노백린]]의 추도 집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하고 고인의 약사를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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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unchiho1945.jpg|thumb|right|150px|사촌 형 좌옹 [[윤치호]], 그는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교육자이며 사상가였다.]]
* 할아버지 : [[윤취동]](尹取東, [[1798년]] ~ [[1863년]])
* 할머니 : 고령신씨(高靈申氏, ? - ?, 조부 윤취동의 본부인)
* 할머니 : 안동김씨(安東金氏, [[1800년]]? - [[1900년]] [[10월]], 아버지 윤웅렬 형제의 생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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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매부 : 이정구(李鼎九), 본관은 우봉
* 아버지 : [[윤영렬]](尹英烈, [[1854년]] [[음력]] [[4월 15일]] - [[1939년]] [[양력]] [[11월 4일]])
* 어머니 : 청주한씨 한진숙(淸州韓氏 韓鎭淑, [[1851년]] - [[1938년]]), 한말 [[전라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 [[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韓鎭昌)의 누이
** 형 : 동암 [[윤치오]](東庵尹致旿, [[1869년]] [[음력 8월 5일]] - [[1950년]] 양력 [[12월 22일]])
** 형 : 동야 [[윤치소]](東野尹致昭, [[1871년]] [[음력 8월 25일]] - [[1944년]] 양력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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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모 : 이름 미상
** 이복 동생 : 윤치일(尹致日, [[1935년]] [[2월 10일]] ~ ?)
** 이복 제수 : 김정숙(金貞淑, 김해김씨, [[1938년]] [[3월 10일]] ~ ), 김계준(金溪俊)의 딸
* 부인 : 전주이씨([[1875년]] [[9월 16일]] - [[1906년]] [[12월 18일]]), 1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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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대손 : 윤지호(尹智湖)
**** 증손자 : 윤진영
***** 5대손 : 윤예진
**** 증손녀 : 윤성원
*** 손자 : 윤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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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버지 : [[윤웅렬]](尹雄烈, [[1840년]] [[음력 4월 17일]] - [[1911년]] 양력 [[9월 22일]])
* 큰어머니 : 전의이씨([[1838년]] [[6월 9일]] - [[1907년]] [[3월 4일]])
* 큰어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 [[1844년]] [[9월 27일]] - [[1936년]] [[2월 12일]])
** 사촌 누나 : 윤경희(尹慶姬, [[1862년]] - [[1931년]])
** 사촌 형 : [[윤치호]](尹致昊, [[1864년]] [[12월 26일]] - [[1945년]] [[12월 9일]])
* 큰어머니 : 김정순(金貞淳, [[1879년]] [[3월 15일]] - [[1959년]] [[11월 16일]])
** 사촌 동생 : 이름 미상, 요절
** 사촌 동생 : [[윤치왕]](尹致旺, [[1895년]] [[2월 17일]] ~ [[1982년]] [[12월 21일]])
** 사촌 동생 : [[윤치창]](尹致昌, [[1899년]] [[3월 5일]] - [[1973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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