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주석 → 각주)
6번째 줄:
|날짜=[[1835년]] [[10월 2일]] ~ [[1836년]] [[4월 21일]]
|장소=[[텍사스]]
|결과=[[텍시언]]의 승리, [[벨라스코 조약]]<br />[[텍사스 합병]] 1845–1846<br />[[멕시코-미국 전쟁]]
|교전국1=[[파일:Flag of Republic of Texas (1836-1839).svg|70px|center]]<center>[[텍사스 공화국]]</center>'''지원'''<br />{{USA}}
|교전국2=[[파일:Flag of Mexico (1823-1864, 1867-1893).svg|border|85px|center]]<center>[[멕시코 제1공화국]]</center>
113번째 줄:
== 산타안나의 반격 ==
=== 텍사스 작전 ===
[[10월 27일]] 일찍, 산타 안나는 텍사스의 소요를 진압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는 “텍사스 작전”이라고 그가 언급한 것을 이끌기 위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이런 조치는 코스를 안심시켰고, 텍사스 반란을 끝내게 했다. 산타 안나와 그의 부하들은 텍시언들이 빨리 겁을 먹을 거라고 믿었다. 멕시코 국방부 장관이었던, 호세 마리아 토르넷은 당시 텍사스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용문2|켄터키 산무지랭이들과 미주리 사냥꾼들에 대한 멕시코 군의 우월감은 잘 알려져 있다. 전쟁에 20년간 단련된 베테랑들이 전술도 모르고, 원칙도 없고, 반항 잘하는 군대에 겁먹을 리 없다.|호세 마리아 토르넷}}
 
137번째 줄:
패닌은 퇴각은 망설였고, 약 300명에 이르는 그의 부하들과 콜레토 크릭 근처의 개활지인 대평원에서 발을 묶였다. 그들은 멕시코군에게 세 번의 중화기 공격으로 교전했다. 밤 새 우레아군은 텍사스군을 포위하고, 대포와 증병을 해서 다음날 [[3월 20일]] 패닌의 조건부 항복을 받아냈다. 약 342명의 텍사스군이 이 [[골리아드 작전]]으로 잡혔다. 일주일 후인 [[1836년]] [[3월 27일]] 산타 안나의 직접 명령을 받고, 그들은 모두 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골리아드 학살]]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ref name=p379 />
 
하버트 데븐포트는 다음과 같이 이 사건을 논평했다.<ref>Harbert Davenport,[http://www.tshaonline.org/publications/journals/shq/online/v043/n1/contrib_DIVL373.html "Men of Goliad"], Volume 43, Number 1, Southwestern Historical Quarterly Online (Accessed Tue October 31, 2006)</ref>
{{인용문2|골리아드 학살의 충격은 매우 중대했다. 이 사건 이전까지 산타 안나의 평판은 잔인하기보다는 교활하고, 능숙한 사람이었다. 알라모의 함락과 함께 산타 안나와 멕시코군 모두 잔인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텍시언들과 미국, 심지어는 영국과 프랑스까지 분노에 불을 지폈다. 그리하여 텍사스 혁명의 진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했다.|하버트 데븐포트}}
 
177번째 줄:
* [[텍사스 독립기념일]]
 
== 주석각주 ==
{{각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