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156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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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박진 장군 묘비
|제목= 박진 <br />(朴晉)
|출생일= [[1560년]] [[8월 25일]]
|출생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군|밀양부]] [[밀양시|밀양읍]] 내일동(현 [[밀양시]] 내일동)
|사망지= [[조선]]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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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
|이름=박진 (朴晉, 朴晋)
|생애=[[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
|그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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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朴晉<ref>晋으로도 쓰인다.</ref>,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장수 중의 한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 벼슬을 지냈다. [[음서 제도|음서]]로 출사하여 [[여절교위]]로 재직 중 무과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 후 [[비변사]]에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심수경]]의 추천으로 발탁되어 [[선전관]]으로 출사하여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초기의 [[밀양성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영천성]]에서 의병 주도로 벌어진 [[영천성 전투]]를 지원하여 승전을 거두었고 이후 왜적 111명의 수급을 베어 왕에게 올렸으며, [[제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159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순천부사,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596년]]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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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
박진은 [[1560년]](명종 15년) [[8월 25일]] [[경상남도]] [[밀양군|밀양부]] [[밀양시|밀양읍]] 내일동에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밀흥부원군(密興府院君)에 [[추봉]]된 [[박인수]](朴麟壽)와 김자달(金自達)의 딸 증 정경부인 강릉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인수]]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호군]](行義興衛副護軍)과 [[병마절도사]]를 지냈은아 후일 그의 공적으로 여러번 [[추증]]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규정공 박현의 후손으로, 충정공 청재 [[박심문]]의 5대손이다. 증조부 박백령은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할아버지 박언은 [[세자익위사]]부솔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후일 정승을 지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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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여회(汝晦<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84_000890 박진]</ref>),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였다. 일찍이 윤화달의 딸 파평윤씨와 결혼했으나 상처하고 계배인 김시회의 딸 안동김씨와 재혼하였다.
 
무관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음서 제도|음직]]으로 군관이 되었다. [[여절교위]](厲節校尉)로 재직 중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84_000890 박진]</ref>
 
이후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무인을 불차채용할 때 [[심수경]](沈守慶)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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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원관 전투 ====
{{참고|작원관 전투}}
박진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려면 꼭 통과해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ref name="jakwon"/>
 
일본의 제1군 고니시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양산 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여 방어 병력이 전무한 양산으로 곧장 진격한 일본 제1군의 선발대는 17일 양산에 무혈 입성했다. 4월 18일 동래성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다시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급파시켰다. 여러 곳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하늘처럼 높아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을 따라 밀양성으로 달렸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군사도 없는 무인지경에 빠져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낙동강을 따라 북진하였다.<ref name="jakwon"/>
 
고니시가 주력군의 선두에 서고 소오 요시토시 등 여섯 장수가 일본군 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밀양성의 병력을 만났는데, 조선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 지형으로 우회시켰다.<ref name="jakwon"/> 이때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양산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좁은 길과 강의 벼랑 사이에 적은 군사들로 길목을 지켰다.<ref name="jakwon"/>
 
작원관 전투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이 조선군들은 박진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이들을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ref name="jakwon"/>
 
박진은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에는 절벽이요, 뒤와 옆은 적이었다. 그들은 죽느냐 죽이느냐하는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과 바위를 굴러 항전하다 조총에 총격을 당해도 일본군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일본 주력군도 앞면과 옆면으로부터 공격해 왔고, 최후의 일각까지 밀양 관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대병력을 이기지 못했다.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 3백여 군사가 거의 전멸당하고, 부사 박진과 부하 몇 명만 후퇴했다.<ref name="jakwon"/>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도주했다.<ref name="ja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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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제2차 경주성 전투 ====
[[파일:Beeguekjinchoenroe.jpg|썸네일|왼쪽|180px|임진왜란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
 
이어서 [[안강]](安康)에서 장군 회의를 열어 16읍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성(慶州城)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여 [[권응수]](權應銖),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등을 선봉으로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경주를 공격, [[경주 전투|제1차 경주 전투]]를 치렀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500명의 군사만 잃고 후퇴했다.
 
그러나 흉흉해진 군사들의 사기를 돋운 뒤 한달 후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경주 전투|제2차 경주 전투]]를 치렀다. 이때 신예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을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고 [[영남]] 지역의 왜군들을 해안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상주나 서생포로 퇴각하여 영남 지역 중심부 수십개의 읍의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9월 [[조선 선조|선조]]로부터 양가죽 옷을 특별히 하사받았다. [[1592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했다.<ref>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1일(정사) 9번째기사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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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파일:Tomb of Park Jin.jpg|thumb|right|160px|박진 장군 묘<br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
[[경기도]] [[적성군]] 두일리(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149-2 [[홍의로]](洪義老)의 묘소 위편에 안장되었으며<ref>그의 묘소 바로 아래 17m 지점에 홍의로의 묘가 있고, 홍의로 묘에서 12m 아래는 홍의로의 부인 서원염씨 묘소가 있다.</ref>, 그의 사후 모친은 그의 묘소 근처에서 살았다.<ref name="gu188"/> 사후 [[윤성립]]과 [[한준겸]]<ref>인조비 인열왕후 한씨의 친정아버지</ref>의 건의로 조정에서 유족을 구휼하였다.
 
그의 구타 사망 사실은 바로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에서 언급함으로써 알려졌다. [[1597년]] [[5월]]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장에서 그가 [[중국인]]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으며, 그의 노모를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ref name="gu188"/>
 
바로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증직되었다가 후일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고,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한때 [[민간인출입통제구역]] 내에 위치해있었으나 후에 공개되었다. 묘소의 오른쪽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는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1736년]](영조 12년) [[12월]]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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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