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둔자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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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만주 남부의 통합 독립군부대 조직 ===
[[1920년]] [[5월 28일]] [[대한독립군]]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조직하고 군무도독부의 병영인 화룡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국내 진입전을 계획했다.<ref name="yunghans74">윤병석, 《간도역사의 연구》(국학자료원, 2006) 74페이지</ref> 이 무렵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게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가 약 550명으로 총 대원 1천 2백여 명으로 일제 측에 의해 탐지되었으며, 화력으로는 무기가 기관총 2문, 군총 약 9백 정 이상, 권총 약 2백 정, 폭탄(수류탄) 약 1백 개, 망원경 7개, 탄환 군총 1정 당 150발 등으로 집계되었다.<ref name="yunghans74"/>
 
또한 대한군북로독군부의 중요간부와 각급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ref name="yunghans75">윤병석, 《간도역사의 연구》(국학자료원, 2006) 75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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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5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와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간도 국민회 소속 부대, 안무(安武)가 이끄는 부대, 신민단 등 만주 지방에서 활약하는 독립군 부대들이 왕청현 [[봉오동]]으로 집결했다.<ref name="parkus310">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310페이지</ref> [[봉오동]]은 산을 가운데 두고 좌우 골짜기에 마을이 자리잡았는데 모두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홍범도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산마루에 진을 치고 주변 마을에 정찰대를 파견,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렸다.<ref name="parkus310"/> 그러나 [[일본군]]이 쉽게 나타나지 않자 이들은 선제 공격을 계획, 감행한다.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 화룡현(和龍縣)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한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1개 소대를 초토화했다.<ref name="sodae">[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878‘무적 황군’ 신화 깬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 중앙선데이 제257호, 2012.02.12일자</ref> 일제는 즉각 육사 23기 출신의 [[아라요시 지로]](新美二郞) 중위에게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를 보내 뒤쫓게 했다.
 
== 전개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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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남양수비대 격파 ===
[[6월 4일]] 아침, 기습공격에 대한 보복조치로서 [[니히미 지로]] [[남양수비대]] 예하 육군 중위가 인솔하는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공격해왔다. 일제는 이 기습 작전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겠다고 新美 중위가 인솔하는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병력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추격케 했다.<ref name="yunghans76"/> 삼둔자 주둔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확인한 국경초소지대의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해왔다.
 
이들 부대는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분풀이로 무고한 양민만 살육했는데,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야산 요지에 잠복하였다가 이들을 공격하여 섬멸시켜 버렸다. 이것이 바로 삼둔자 전투로서 [[일본군]]이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너 [[만주]] 영토로 불법 출병해 독립군과 전투를 벌이다 참패를 당한 것이다.<ref name="yunghans76"/>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崔振東)은 독립군을 매복시켜 놓고 유인해 [[남양수비대]] 예하 중대를 격멸시켰다. 아라요시는 잔존 병력을 끌고 급히 도주했다.<ref name="sodae"/> 이로서 [[6월 6일]] 새벽, 전투는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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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재출병 ===
이후 [[6월 6일]] 오전 10시 [[일본군]]은 잠복해 있는 [[독립군]]부대 앞까지 추격해왔다. 6월 6일 점심때까지 독립군은 100m 안팎의 산악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 병력 60명을 사살하였다. 독립군은 2명이 전사하고, 근처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 9명이 유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소대장 이화일의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일본군]] 제19보병사단장은 [[일본군]] 19사단 소속 보병 소좌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인 [[월강추격대대]]를 출동시켰다. 독립군 밀정이 새다리에 편지를 묶어서 띄워 보낸 편지를 통해 1,2시간 만에 이 사실을 접한 [[홍범도]], [[최진동]] 등 독립군 지휘에서는 1개 대대급도 안되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이로운 꼭대기 고지에 올라가서 시야를 넓히는 것이 덜 불리하리라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조를 나누어 일부는 산 꼭대기로 올려보내고, 일부는 안산(安山) 촌락 후방고지에 진지를 만드는 한편, 인근 지역에 목책과 허수아비들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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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