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연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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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밀리아 ====
[[미사 전례]]에서 [[연극]]으로의 과정은 서구교회의 독창이 아니다. [[비잔틴]]의 동방(그리스) 교회에서는 이미 2세기 이후 [[구약성서]]에서의 구세주의 예언이 대화화(對話化)되고, 4세기 후반 이후는 [[신약]]과 [[사도서간]](使徒書簡)도 원문에서는 대화로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대화로 짜여졌다. [[성모 마리아]]에의 [[수태고지]]나 그리스도와 악마와의 대화가 이 무렵에 생겨났다. 당시의 동방에는 [[고대 그리스 연극|그리스 연극]]의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대의 수사법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고대극의 오리지널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제(司祭)와 조제(助祭) 사이에 주고 받는 '''호밀리아'''(homilia)라고 불리는 이러한 [[그리스어]]로 된 대화는 그 당시의 연극과는 물론 아무런 관계도 없고 연극을 의도하지도 않았으나, 그것은 연극이 싹트기 시작하기 이전의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완전히 남아 있는 이 무렵의 호밀리아는 [[성 메토디오스]](Met­hohios:311년 또는 312년 殉敎)가 쓴 <향연, 또는 순결에 관해서>뿐이며, 나머지는 단편들이다. 진정한 극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가장 오랜 수난극은 <수난의 그리스도>(다만 주인공은 마리아)이다. 이것은 원래 그리스의 교부(敎父)였던 [[나티안츠]]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의 작품으로 믿어져 왔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의문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미사 전례를 연극화한 개척자의 한 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탈리아와 안티탈리아====
[[아리아니즘]]이라는 이단의 창시자인 [[아레이오스]](Areios, 336년에 사망)는 고래(古來)의 민족적 예능을 기독교의 미사 전례에 살리기 위해 '''탈리아'''(Thalia)를 만들었다. 이것은 [[카덴차]]가 있는 통속음악을 반주로 하여 송가(頌歌)와 시편(詩篇)을 낭창(朗唱)하는 방법이다. 또한 여기에 맞추는 리드미컬한 몸짓도 정해져 있었다.
 
그때까지의 시편의 단조로운 낭독을 고수하고 있었던 정통교회는 탈리아에 반대하여 15년 동안이나 싸웠지만 마침내 자기 편에서도 새로운 스타일의 교회가(敎會歌)를 도입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안티 탈리아'''(anti­Thalia)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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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연극의 전성기====
파괴운동이 끝난 뒤 교회와 국가의 후원으로 다시 숨을 돌린 교회 내에서의 연극은 이전보다 더 성대하게 연출에 주력했으며 10세기에 두 번째의 융성기를 맞이했다. 그 정점은 10세기 또는 늦어도 11세기 초에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교회나 다른 교회당에서 상연되고 그 후에 몇 번이고 되풀이된 그리스 지방어(地方語)에 의한 대수난극이다.
 
여기에는 [[나사로]]의 소생,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入城), [[최후의 만찬]]과 세족(洗足),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포함한 [[감람산 재판]], 십자가형(十字架刑), 매장, 부활 등의 주요한 장면이 망라되고 있다. 비잔틴보다 훨씬 뒤늦게 출발한 서구가 이미 시민에 의한 교회당 밖의 종교극의 극성기를 맞았던 15세기에 이르러서도 [[데살로니카]]의 [[시메온]](Simeon)은 동방과 서방을 비교하여 동방에서는 평신도가 예외적인 극외에는 참가할 수 없고, 보통은 대주교·주교 및 사제들이 위계(位階)와 덕망에 따라 배역을 분담했으며,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역은 특히 신앙이 두터운 성직자만이 맡게 되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시메온은 동방교회 쪽의 신앙심이 더 깊다고 주장하나, 이 증언은 연극이나 예술 일반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역사의 발전을 좌우하는 서구와 동방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후 1453년 [[터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비잔틴 교회의 종교극은 막을 내렸으며, 그 역사는 최근까지 망각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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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종교극의 출발====
비잔틴에서는 비의(秘儀)를 신도 이외에게는 글자 그대로 숨기는 태도와 흉내를 내는 표현이 뚜렷이 다른 길을 걸었다.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깊숙이 숨겨진 데 비해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눈을 되도록 끌기 위해 성당의 한가운데에서 공개되었다. 이러한 동방사상은 [[비잔틴 문화]]의 서구전파와 함께 5-6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우선 음악에서 시작되어 미술, 연극의 순서로 차차 강하게 서구로 침투하였다. 서구에서의 성탄제극과 부활제극의 성장, 1100년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예언자극, 13세기에 [[이탈리아]]·[[프랑스]] 및 독일어권에서 일어난 대규모 수난극 등은 모두가 비잔틴에서 기원된 것이다.
 
서구에서 종교극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부터이다. 처음에는 당시 [[프랑크 제국]]의 문화중심지였던 [[잔크트 갈렌]]([[스위스]] 북동부)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사(修士) [[투틸로]](Tutilo, 850년경-913년)의 부활제·트로푸스라는 것이 종래의 정설(定說)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는 여인들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 사이에 주고 받는 교창(交唱)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프랑스의 학자 [[셀리]]는 933년-936년에 [[리모즈]]의 산 마르시알 수도원에서 있었던 동명의 부활제 트로푸스(進行句)의 존재를 지적함과 동시에 성탄제 전야의 전례를 중세연극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또한 이탈리아의 학자 [[데 바르톨로미어스]]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스콜라 칸토룸에서 생겨난 교창집(交唱集)을 가장 오랜 원형(原型)으로 보기 때문에 현재로는 어느 것이 원형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이들은 그리스어의 호밀리아와 마찬가지로 아직 연극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부활제의 밤에 주의 부활을 정신적으로 기다리는 사제나 신도들의 긴장감과 부활의 기쁨을 통한 해방감이 부활제 트로푸스의 연극화를 촉진하였음은 의심할 나위도 없는데, 그것이 바로 연극적인 생명으로 눈뜨는 것은 트로푸스에 묘지방문이라는 행위가 따를 때인 것이다.
 
[[에델월드]]가 975년에 만든 <묘지방문>의 중심 장면에서는 천사가 세 사람의 마리아에게 십자가와 그것을 덮었던 흰 보를 가리키고 다음에 마리아들이 흰 보를 펼쳐 보이며 신도들에게 주의 부활을 알리는 장면이 노래 사이에 들어간다. 이것이 단순한 상징이나 또는 전례적 행위가 아니라 "이는 무덤 앞에 앉은 천사와 주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온 여자들의 시늉으로서 행해진다"라고 한 대본의 말로 보아도 극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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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극의 연기·의상·무대====
* 연기
유럽의 기독교적 부활제극에는 일찍부터 몸짓이 나타나 있었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는 마리아들은, [[영국]]에서는 무엇인가를 찾는 몸짓으로 표현되고, 뉘른베르크([[독일]])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등장하여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울다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창극(歌唱劇)에서는 목소리에 표정을 담았다. 다만 교회의 생각으로는 세속적인 정감을 자아내지 않기 위해 그 노래는 박자를 맞춘 리드미컬한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되었으며, 단조로운 송가조(頌歌調)여야만 했기 때문에 그대신 출연자는 목소리의 강약으로 자신의 역할을 특징지으려 했다. 예컨대 천사는 고상한 목소리로 무덤에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부활을 알리는 것 등이다.
* 의상
의상은 처음에는 오직 고대 후기의 평상복이나 예복에서 온 성직복 또는 제복(祭服)이 사용되었으나 그것도 무차별한 것이 아니고 되도록이면 배역에 어울리도록 연구했다. 그리고 전례없는 소도구도 이용되었다. 12세기의 몽산 미셸에서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맨발에 턱수염을 기르고 손에는 촛불을 들고 왕관을 쓴 모습으로 등장했다. 또한 13세기의 푸르리 수도원(스위스)에서는 극의 도중에 의상을 바꾸었다. 그리스도는 처음에 긴 하의를 걸친 정원사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손에는 삽을 쥐고 있었으나 부활 후에는 다르마티카(上衣)에 삼각모를 쓰고 오른손에 십자가와 기(旗),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나타난다.
* 무대
상연의 장소는 대개 교회 안이었다. 부활제극의 무덤 장면으로는 주제단(主祭壇)과 옆 제단, 지하 성당이나 혹은 성가대석 등 여러 곳이 사용되었다. 또한 그 표현으로는 암시적인 경우도 있었고, 상당히 구상적(具象的)인 세트를 장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라하]]에서는 교회 중앙의 넓은 장소에 책상을 두고 향유상인(香油商人)의 장면이라 했다. [[투르]](프랑스)에서는 후세의 동시무대와 같은 원리로 장면마다 다른 연희장소(演戱場所:복도)가 준비됐다. 성탄제극에서는 제단을 마굿간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푸르리]]의 <사울(바울)의 회개>극에서는 내진(內陣)의 한쪽이 예루살렘, 반대쪽을 다마스커스로 나타내고 주인공이 거기를 왕복한다. 13세기의 베네딕트 보이에론(독일)의 대수난극에서는 16이상의 장면이 있는 동시무대<ref>같은 평면 위에 보통 하나의 장면밖에 없고 이를 차례로 전환시킴으로써 많은 장면을 연출하는 근대연극에 반하여 처음부터 많은 장면을 일렬이나 방형(方形)으로 벌여놓고 그것을 하나씩 사용하며 이에 따라 관객도 이동하는 중세 특유의 수법</ref>를 교회 안에 설치했다. 이 무렵까지는 1204-1205년의 [[리가]]의 예언자극과 1244년 [[파도바]](이탈리아)의 수난극, 부활제극을 제외하고는 [[라틴어]] 종교극에서 시중(市中)의 광장을 사용한 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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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어의 교회당내극====
[[라틴어]]의 가창극에 대한 지방어<ref>서유럽의 교회용어이며 동시에 국제어인 라틴어에 대하여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 등을 말한다</ref>의 침입은 1100년경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얼마 후 대본의 장대화(長大化), 동시무대의 장면 수의 증가 및 평신도의 진출이 필연적으로 종교극을 교회 밖이나 혹은 거리의 광장으로 끌어냈다고 하겠으나 지방어에 의한 교회당내의 연극도 상당히 있다. [[독일어]]에 의한 가장 오랜 대수난극인 1330년의 잔크트 갈렌 수난극은 교회 안에서 상연되었다.
 
그리고 독일어권에서 최대규모의 종교극인 1514년의 보오첸의 4일간에 걸친 수난극도 그곳 교회에서 상연되었으며, 또한 런던에서는 16세기 전반까지 지방어의 종교극이 자주 교회 안에서 상연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비잔틴의 '엔코미아'와 흡사한 극적 찬가(劇的讚歌)인 이탈리아어의 '라우다'가 13세기 이후, 그것에 바탕을 둔 종교극은 15세기까지 교회 내에서 개최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성실한 극이라 하겠으나, 교회 안에서 상연한다 하여 외설·잔인한 장면이나 혹은 연출을 삼갔던 것은 아니며, 한마디로 말해서 시대가 바뀜에 따라 교회의 내외를 불문하고 비속화·오락화·서민화의 정도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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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극과 패전트곡====
1200년경 아라스(프랑스)의 [[보델]](J. Bodel)이 쓴 니콜라우스극은 50년 후의 파리 루트부프(Ruteboeuf)의 <테오필>과 함께 14세기의 유명한 마리아 기적극으로 발전한다. 12세기에 프랑스의 정복하에 있었던 영국에서도 앵글로 노르만어의 기적극이 유명했다. 이러한 야외극의 주최자는 상업 길드나 수공업 조합이다.
 
성체제(聖體祭)의 개혁(1311) 이후는 특히 패전트극이 즐겨 상연되었다. 이것은 이교시대의 봄의 퍼레이드(行列)의 풍습을 계승한 성체행렬의 행사의 일환으로서, 길거리에서 몇몇의 작은 장면을 상연하는 것이며, 중세 말기에는 3일에서 1주일가량 계속되는 커다란 행사로 발전했다. 패전트에서는 각 조합이 담당한 장면을 수레 위에 가설(車舞臺)하고 그러한 수레를 차례로 끌고 다녀 일련의 극을 연출한다. 결국 이것도 병렬적인 동시무대의 한 형식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독일어권에 있는 것과 같은 입체적 동시무대가 영국에서 사용된 예도 있다.
 
====도덕극====
1375년 이후 체스터서 [[헨리 프란시스]](Francis)가 성서의 일부를 영어의 대화조로 각색, 영어로 된 성서극의 길을 개척했다. 이 무렵 영국의 교회는 인심교화를 위해 성서의 낭독이나 설교 대신에 그것을 도덕적인 극의 형식으로 상연할 것을 권장했던 것이다. 여기서 종교극과 세속극과의 중간에 놓여있는 '''모랄리티 플레이(도덕극)'''라는 새 장르가 생겨났다. 선과 악, 신과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획득하려고 서로 싸우는 그 중심주제는 아직 중세기에서는 15세기 말의 대표작 <에브리먼>처럼 화해적 결말로 끝나고 있으나 그 후 [[바로크 시대]]로 계승되어 근대적 갈등극의 뿌리를 박았다.
 
독일어권에서 프랑스의 뒤를 이은 곳은 오늘날의 스위스 북서부이다. 13세기 중엽에는 아르가우의 베네딕트회 수도원 무리에서 독일어 최초의 종교극이 태어나고, 그 뒤 20-30년이 지나 무리의 계통을 이은 잔크트 갈렌 성탄제극이 나타난다. 그러나 13세기말에 마인츠 지방에 탄생한 '라인부활제극'은 무리와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라틴어의 전통을 직접 계승한 것이라고 하겠다. 독일어권에는 순교자극이나 마리아 기적극이 프랑스만큼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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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 부활제극====
오늘날 그 모습이 가장 상세하게 알려져 있는 것은 15세기에 시작되어 전형적인 입체적 동시무대를 사용한 '''루체른의 수난극'''이다. 이것은 '''부활제극'''이라고 불리나 그것은 [[부활제]]의 전후에 개최된다는 의미로서 내용은 그리스도의 인류구제의 역사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수난이 있으므로 수난극으로 분류해도 된다. 공연 비용의 일부를 시가 부담하기도 하나 주최자는 1470년에 설립된 포교단체이다. 이것은 15세기에 적어도 3회나 열렸고, 16세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연출자를 두었다.
 
역대의 연출자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상세한 연출 메모를 남긴 [[치자트]](R. Cysat)이다. 1583년의 그의 연출에서는 회장이 되었던 광장의 중앙에 높다란 2중의 판자를 치고 이것이 지면과 인접한 집의 2층 창문과 함께 3층의 입체적 동시 무대를 구성한다. 각 장면은 지정된 일부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장면에 따라서는 2, 3층 전체를 활용하고 또한 3층의 지붕에서 물을 흘러내리게도 했다.
 
주요한 배역은 성직자·관리·도시 귀족 및 동업조합이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극의 역할은 사회적 지위와 일치되어야만 한다고 생각되던 시기였으므로 하층민은 가벼운 역할밖에는 출현할 수 없었다. 상연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출연자 전원이 분장하여 행렬을 짜고 회장에 들어간다. 앞장을 선 악마의 한 무리는 보안 담당도 겸하고 있어 상연중에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으면 지옥의 문 안으로 끌어넣었다. 행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사도(使徒)와 마리아를 거느린 그리스도의 일행이다. 분장이 되어 있으므로 분장실은 필요 없으나 저녁까지 걸리는 연극의 출연차례를 기다리기 위하여 광장의 한구석에 판자로 둘러싸인 각 장면의 출연배우의 대기소가 만들어져 있다. 주변의 3, 4층 건물의 민가들은 거의 관람석의 구실을 하나 일부는 앞서 말한 대로 극에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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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스===
'''파르스'''(farce)는 프랑스의 사육제인 넌센스극에서 시작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대본은 16세기의 것이나 14-15세기에 이미 매우 활발해졌다. 일반적으로 간소하고 장치가 없는 무대를 광장이나 옥내의 홀에 설치하고 사람들은 대개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주최자는 거의가 바보회(會)라고 불리는 동업단체이다. [[아비뇽]]에서는 학생의 파르스 배우가 인기를 모아 소공업의 기능공과 겨뤘다고 한다.
 
작자 불명의 유명한 <파트랑 선생>은 1465년에 르왕에서 초연되어 15세기 말까지는 25회나 판을 거듭했고 오늘날까지 상연되고 있는 넌센스극이다. 유명한 것으로는 1512년에 파리에서 상연된 <바보왕자>가 있다. 네덜란드의 소테르니엔, 또는 쿠르프텐이라고 불리는 희극의 주요 테마(남녀의 싸움, 가정소동, 간통)는 프랑스의 파르스나 독일의 사육제극과 공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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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의 역사]]
 
== 주석각주 ==
<referen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