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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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하'''는 [[196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이효순'''이었다. 아버지 이배영은 유명한 아코디언 연주자였고 이은하는 약 5세부터 음악을 접했고 어린 나이에 무대에 출연하면서 음악적 능력을 길렀고 아버지로 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트로트]]를 배우기 시작하였지만 변성기를 일찍 겪어 허스키한 목소리였던 이은하는 [[솔 음악|소울 팝]]으로 전향하였고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닐 무렵, 만 12세 나이에 [[1973년]]에 ''님마중''(김진규 작사/작곡)으로 가수로 데뷔하였다. 데뷔 직후 무명 가수였던 이은하는 밤무대나 나이트 클럽에 나가서 노래를 불러야만 했고 [[1975년]]에 방송상 엄정한 규제때문에 당시 미성년자는 무대에 출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1958년]]생으로 3살 올려 등록하였으며 나이를 속일려고 일부러 화장을 짙게 하면서 20대 아가씨로 위장하여 가수 활동을 하게 되었다.
 
어렵사리 공중파 무대에 출연하게 된 이은하는 첫 히트곡이 된 [[1976년]]에 발표된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태정 사/원희명 곡)이 처음으로 유행세를 타고 난 이후 [[1978년]]에 [[유승엽]]이 작곡하고 작사한 〈밤차〉(유승엽 작사/작곡)를 부를 때 [[춤|찌르기 춤]]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디스코]] 여왕으로 불렸다. 그리고 [[1979년]]에 발표하고 본인이 처음으로 작사한 〈아리송해〉(이은하 작사/이승대 작곡)가 대박을 떠뜨렸고 그 해에 KBS 가수왕상을 수상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곡으로 송해라는 이름이 들어가 [[송해]]에게 혼났다는 얘기도 있다. 파워풀한 가창력을 인정받았던 이은하는 [[1981년]]에 KBS [[세계 가요제]]의 [[그랑프리]]에 자신의 곡〈밤차〉로 출전하여 우수가창상을 수상하였다.
 
[[1982년]]에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던 탑스타 이은하는 영화계에 발을 디뎠으며 처음으로 영화 《날마다 허물을 벗는 꽃뱀》이라는 성인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성인영화에 출연하는데 꺼려했던 아버지 이배영은 당시 국민배우 [[이대근]]의 설득으로 이은하의 영화 출연을 허락했었다.
 
1970년대부터 허스키한 목소리와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당대 최고의 댄스 팝 가수로 각광받았던 이은하는 라이벌로 불리던 [[혜은이]]와 함께 경쟁하면서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1986년]], 이은하가[[이은하]]가 작사하고 고인이 된 [[장덕]]이 작곡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라는 서정적인 사랑의 노래를 불러 최고의 정점을 찍었다. [[1989년]], [[전영록]]이 작사/작곡한〈돌이키지마〉가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곡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은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는 10대 가수상을 9년 연속으로 수상한 이례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콘서트]]나 [[뮤지컬]]을 하기도 했다. 이은하는 지난 [[2007년]]에 가수로 복귀하였고 그 해 [[서울가정법원]]에 호적정정허가신청서를 냈으며 자신의 실제 생년을 주민등록상으로 [[1958년]]에서 [[1961년]]으로 정정되었다. [[2012년]]에는 5년 만에 새롭게 [[재즈]]분야의 음악으로 전향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